안개 낀 시절
최근 넷플릭스에 대만 영화 한 편이 올라왔다. 작년 대만에서 개봉되어 흥행 돌풍을 일으킨 <안개 낀 시절>(원제:大濛)이다. 얼마 전 극장 개봉을 앞두고 작은 소동이 있었던 후효현 감독의 <비정성시>의 시대적 배경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을 놓치기 힘들 것이다. 영화는 1950년대 초 대만의 정치상황을 그리고 있다. 영화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짧게 서술한다.
1949년 대륙을 통째로 모택동의 공산당에게 넘겨주고 대만 섬으로 내몰린 장개석의 국민당은 어수선한 시국을 정돈하자며 계엄령을 선포한다. 1949년 시작된 대만의 계엄은 무려 38년을 이어간다. 그동안 대만은 경제발전을 채찍질하며 잃어버린 땅을 수복하기 위해 매진한다. 계엄령 당시 많은 사람들이 불순분자, 공산분자로 몰려 잡히고, 고문당하고, 처형당한다. <안개 낀 시절>은 그 때 처형 당한 학교선생님과 그 가족이 겪어야했던 고난을 담고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1954년(民國43年)의 대만 시골풍경을 보여준다. 우리에겐 아리산으로 잘 알려진 자이(嘉義)이다. 드넓은 사탕수수밭에 숨어있는 오빠를 위해 동생이 먹을 것을 몰래 갖다준다. 오빠는 동생에게 손목시계를 건네주며 “지금은 힘들어도 내일은 괜찮을 거야. 힘들 때는 이 시계를 돌려 봐. 1년 뒤, 2년 뒤, 10년 뒤에는 어떤 세상이 되어 있을지 생각해봐.”란다. 오빠는 그날 체포되어 끌려간다. 그리고 날아든 통지서. 오빠는 총살 당했고, 극락장의사(極樂殯儀館)에 시신이 안치되어 있으니 가족은 인도해 가라는 통지문이다. 이제부터 어린 소녀는 오빠의 시신을 넘겨받기 위해 혼자 타이베이로 험난한 여정을 시작한다. 소녀는 타이베이에 도착하자마자 사기를 당하고, 인신매매범에게 팔려갈 위기에 처한다. 이때 제대군인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나고,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헤어졌던 언니와 재회하고 마침내 극락장의사에 도착한다. 그리고 관객은 더 끔찍한 그 시절의 대만을 마주하게 된다.
안개 낀 시절
영화는 대만의 어두운 현대사를 꾹꾹 눌러 담고 있다. 대만 계엄시기는 흔히 백색테러의 시대(臺灣白色恐怖時期)라고 한다. ‘공산’중국과 대치하는 ‘자유’중화민국은 그런 식으로 사회를 징치(懲治)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억울한 체포와 옥살이, 죽음에 이른다.
무방비 상태의 어린 소녀 아웨(阿月)를 도와주는 광동 출신의 제대군인(趙公道)은 국민당군의 퇴각으로 대만까지 흘러온 인물이다. 그는 광동어, 산동어와 대만사투리를 섞어가며 끝없이 욕을 한다. 지금은 인력거를 끌며 입에 풀칠만 하고 있지만 이름처럼 ‘정의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려고 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시대가 그를 가만 두지 않는다. 함께 낯선 대만에 건너온 그의 (군 시절) 상관은 이미 ’불순분자‘로 몰려 총살당했다. 특무요원의 감시는 집요하다.
영화에서 아웨의 오빠는 공산분자로 몰려 처형당한다. 그 시절 정부에 반대하는 많은 ’지식분자‘가 공산주의자, 간첩으로 몰려 옥고를 치르고, 그렇게 처형되고, 이런 식으로 시신이 처리된다.
안개 낀 시절
아마 영화를 보면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극락장의사와 연계된 국방의학원일 것이다. 실제 당시 계엄령에 따라 처형한 뒤 시신은 이곳에 3일간 안치되고, 수령인(유가족)이 없으면 국방의학원으로 보내져 해부실습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유족들이 시신을 인계받기 위해서는 돈을 내야하는데 그게 수월치 않았다. 대만의 날씨와 당시의 병원시설을 생각한다면 시신보관이 가능했을까 싶다. 영화에서는 화학약품으로 채워진 수조에 시신들을 넣어 보관한다. 포르말린 용액이다. 이후 시신들은 육장리(六张犁)라는 곳에 매장된다. 영화 후반부에 매장된 시신을 발굴하는 뉴스 화면이 등장한다.
영화에서 아웨의 언니로 나오는 배우는 ’9m88‘이라는 독특한 예명을 사용하고 있다.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소개된 서기(슈치) 감독데뷔작 <소녀>에도 나왔던 가수이자 배우이다. 영화에서 만화같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가오진쭝‘은 일제 치하 때 일본경찰을 곤혹스럽게 만든 인물(廖添丁)을 모티브로 한다. 한국에서도 소개되었던 천위쉰(陳玉勳) 감독의 전작 <마이 미싱 발렌타인>의 주인공 유관정이 가오진쭝 역으로 잠깐 출연한다. 그리고, 악랄한 특무요원을 연기한 진이문(陳以文)은 대만의 중견 배우이자 감독이다. 오래 전 양덕창 감독 작품부터 넷플릭스에 있는 <아호, 나의 아들> 등에서 만나볼 수 있다.
영화에서 오빠는 동생에게 아름다운 동화를 들려준다. 물방울이 하늘로 올라가서는 구름이 되고, 다시 사막을 적시는 비가 된다고. 마지막엔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늘로 올라간 물방울이 구름이 되지 않고 안개가 되어 바람에 흩어졌다고. 프르말린 수조 속의 시신들, 마지막에 등장하는 손목시계와 함께 가슴을 울리는 장면이다. 영화 원제 ’대몽‘(大濛)은 대만 사투리(罩雺)에서 따온 말이다. 짙은 안개가 낀 모습이다. 대만의 민주화는 고사하고, 허공으로 사라진 운명이라니. 물방울이, 구름이, 안개가, 눈물이 언젠가는 그 땅에서 재회하기를. 자이(嘉義)도 제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