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감독
보통 몇 년씩 준비한 영화의 극장 개봉을 앞두고 감독과 배우들이 매체기자들을 만나 신작에 대한 소개를 하는 시간을 갖는다. 극장에 내걸릴 무렵이면 도하 신문(요즘은 인터넷)에 리뷰와 인터뷰 기사가 일제히 실린다. 그런데, 이번에 류승완 감독은 영화 개봉 뒤에 기자들을 만났다. 설 연휴가 있기도 했지만 개봉 후 반응을 지켜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여하튼 시사회를 통해 ‘류승완 액션과 감성’에 많은 지지를 보냈던 기자들이 감독을 만나 직접 <휴민트>에 대한 생각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요즘 영화 만들 때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익숙함과 새로움의 조화이다. 장르영화를 하는 감독의 숙명이다. 그동안 내가 구축해온 문법을 뛰어넘어 더 노력해야했다. 액션을 연출하면서 영화 전체의 리듬을 다른 방식으로 해보려고 했다. 인물들의 정서를 차분하게, 차곡차곡하게 쌓아 가면 뒤에 이르러 관객들도 자연스럽게 통제가 안 되게 하는 리듬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고 연출의 변을 밝혔다.
# 후반, 액션을 밀어붙이다
“채선화가 부두의 창고에서 악당들에게 넘겨지고 펼쳐지는 장면이 1시간 정도 된다. 그 동안 보기 힘들었던 액션의 리듬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장면에선 20분 넘게 대사가 없는 신도 있다. 그런 장면을 찍을 때는 동료들을 믿고 함께 가는 것이다.”
영화 '휴민트'
#베를린 너머 블라디보스토크
“<휴민트>는 <베를린>의 후속편은 아니다. 물론 그 작품을 만들 때 취재한 내용들이 이번 작품의 기본 세팅이 되었다. 초안은 오래 전에 만든 것이다. 연속성을 가지고 한 것은 아니다. 표종성 이야기는 비교적 후반부에 들어갔다. 이야기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펼쳐지니 이런 대사가 들어가면 ‘베를린’의 후속편을 기다리는 분들에게 재밌는 선물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황치성이라는 인물이 어느 정도 파워인지 한 방에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베를린>에서도 인물의 감정을 다루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특히 그런 정서에 공을 들였다. 감독을 하면서 처음으로 이별의 감정을 염두에 두고 만든 작품이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변하는 것, 소멸하는 것, 헤어지는 것, 그리고 남겨진 사람의 쓸쓸함에 마음이 간다. <베를린>의 정서와 비슷하겠지만 난 좀 더 심플하게, 하지만 더 견고하게 그리고 싶었다.”
# 멜로
“<베를린>에서도 그런 정서가 있었겠지만 강도가 훨씬 세다. 그래서 나도 두려웠다. 배우들도 시나리오를 보고는 알고 있었겠지만 박정민은 당황했을 것 같다. 스파이물은 기본적으로 이별을 염두에 둔다. 남녀 간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이별이라는 정서, 인연의 견고함, 그 관계성이 본질이다.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사람들이 현실을 살아가는 분위기란 게 있다. 그것을 충실하게 담고 싶었다. 배우들이 잘 해주었다.”
류승완 감독
# 류승완, ‘재미의 조건’
“<휴민트>를 찍으면서 미련을 남기지 않았다. 정말 하고 싶은 것 다해봤다. 그동안 내 취향을 극한으로 밀어붙인 것도 있지만 대게 좋아하는데 못 만든 것이 있다. 마치 유년기를 지난 느낌이다. 내 영화창작의 근원은 흉내인지 모른다. 애들이 어른 흉내 내고 싶어 하듯이. 그런 것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래서 여한이 없다. 내일 죽어도 호상일 것이다. 이번 과정을 거치면서 다음 영화가 어떤 모습이 될지 기대된다. 홀가분하다.”
# 인물 클로즈업의 향연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빠져든 것은 스타 때문인 것 같다. 그 때 영화 볼 때는 실재하는지도 모르는 존재들을 클로즈업한 화면이 매력이었다. <휴민트>에서 인물들의 매력을 밀어 붙인 것은 그런 게 볼만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배우들에게 감사하다. 그들에게 특별한 게 있다. 배우들의 매력, 조각 같은 매력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태도가 중요하다. 어떤 영화에서는 배우들의 뒷모습에서도 감정이 느껴진다. 우리 배우들이 글하다. 오롯이 배우가 돋보이게 했고, 그런 것이 후반부에 이르러 액션장면에서 도움이 된 것 같다.”
# 여성착취의 시선
“사실 그동안 베드신은 고사하고 키스신도 안 찍어봤다. 이번에 후반부 장면에 대해 논란이 있는 것 알고 있다. 처음부터 조심했다. 취재할 때부터 그런 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 일이 실제 벌어지고 있다는 것 너무 화가 났다.” (신세경에게 호스로 물세례를 하는 장면) “그런 장면을 어떻게 찍어야할지 나로선 감당이 안 되었다. 잘못하면 여성을 착취하는 시선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어차피 그런 것은 알 것이다. 다른 예민한 문제(글라스 케이지 등)도 있으니. 제 딴에는 조심했지만 그렇게 느끼신 분이 있다면 제가 잘못한 모양이다.”
# 조인성과 박정민
“이 영화(시나리오)를 다시 꺼낸 것은 조인성과 박정민을 함께 담으면 재밌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래 다른 이름이 있었지만 조 과장으로 바꿨다. 그에게는 우아함과 품격이 느껴진다. 나이를 잘 먹어가고 있는 것 같다. 내면이 멋있는 배우이다. 그런 게 조 과장을 만드는데 영향을 준 것 같다. 배우가 그러하니 어떻게 찍어도 멋있게 나올 것이다.”
“(청룡영화상시상식) 우리가 (박)정민이 덕을 보는구나고 그랬다. 그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그게 아니어도 박정민과 신세경의 관계는 빛났을 것이다. 박건 역으로 박정민을 캐스팅한 것은 새로움에 대한 기대였다. 그동안 그는 많은 걸 보여줬다. 특히 <헤어질 결심>에서 그의 매력이 잘 드러난다. 잠깐 나오지만 옥상에서의 액션도 잘한다. 배우에게 그런 걸 어떻게 찍었냐고 물어봤었다. ‘매트도 없고요, 그냥 뛰라고 해서 그랬어요’라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낫지 않니, 우린 매트는 있으니 괜찮을 거야’라고 했다.”
영화 '휴민트'
# 배우, 오디션, 캐스팅
“적합한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영화를 찍다보면 현장에서 애를 먹이는 경우가 한두 명은 꼭 있기 마련이다. 다행인 것은 지금까지 주연, 조연에서는 그런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작품 준비할 때 가장 공을 들이는 게 오디션이다. <휴민트> 시사회에 <세계의 주인>의 그 배우가 왔었다.(서수빈 배우). 무대인사 때 조인성 배우가 내게 ‘그 배우, 우리 영화 오디션에서 떨어졌다’고. ‘무슨 소리야?’그랬다. 우리 모두 <세계의 주인>을 좋게 보았기에. 그런 일들이 많다. 우리 오디션에 떨어진 배우가 다른 영화에 캐스팅 되어 빛나는 경우가 있다. 그 반대도 있고. 다른 감독들도 그런 경우가 다 있다.”(무슨 역할이었나?) “후반부 탈북소녀 역할일 것이다. 캐스팅 기준이 북한사투리였다. 작은 역할 하나에도 캐스팅에 의를 기울이는데 어렵다. 그래서 동료나 후배 통해서 의견을 묻고, 독립영화, 단편영화 많이 본다.”
# ‘휴민트’와 ‘인간’
“제목을 <휴민트>로 정한 것은 장르영화이기도 하지만 ‘사람’에게 집중하고 싶었다. 액션ㅇ여화를 만들어보니 장르영화라면 핵미사일 발사를 막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것도 좋지만 내가 사랑하는 한 사람을 위해, 내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뛰어다니는 것이 더 보편적인 정서를 갖는 것 같다. 사람들이 총에 맞아본 적은 없지만 다들 레고는 밟아봤을 것이고, 칼에 찔러본 적은 없지만 종이에 베인 적이 있다. 내가 아는 정서, 가늠해 볼 수 있는 정도에서 액션을 밀어붙이는 것이다. 그런 것이 점점 더 흥미로워진다. 우리는 거대한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아주 큰 이야기보다 그쪽으로 관심이 더 간다.”
#국정원 블랙요원
“취재하면서 그분들을 만나 이야기 들어보았다. 그 분들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이 든다. 진짜 블랙요원은 가족들조차 그런 사실은 모른다. 그 사람들은 꿈에서라도 실수할까봐 항상 긴장하고 산다고 한다. 그 긴장감이 어떨까. 이야기를 들을 때 정말 짠하더라. 영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휴민트'
# 오마쥬
“존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도 영향을 받았다. 스파이라는 직업이 가질 수밖에 없는 숙명이 이별이다. 장 피에르 멜빌 감독의 <사무라이>(1967)도 그렇다. 그걸 알아채다니. 그건 안 느끼게 하고 싶은데. 그리고 <첩혈쌍웅>, 정확히는 <첩혈속집>도 있다. 내가 이 영화를 찍으면 여한이 없다고 한 것은 그런 것을 이 영화에 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너무 좋아하는 세계인데 안 해본 것이었다. 만약에 내가 존 르카레의 플롯을 흉내 내려고만 했다면, 오우삼과 두기봉의 형식적인 면만 따라했다면 기시감이 확 올 것이다. <휴민트>에서는 그들의 세계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 나온다. 내 취향을 온전히 드러내면서 휴민트의 세계를 완성했다고 생각한다.”
# 로버트 마세
“알렉세이로 나오는 배우 로버트 마세(Robert Maaser)는 넷플릭스 <블러디 앤 골드>를 보고 반했다. 보니 <미션 임파서블>(로그네이션)에도 나왔고, 최근 <발레리나>에도 나왔었다. 제가 그동안 액션을 많이 해봤지만 신체능력이 탁월하다. 지금까지 본 사람들과 차원이 달랐다. 스턴트더블이 따라잡지를 못해 스턴트연기도 직접 했다. 최근 가족들과 함께 우리나라에 왔었다. 가정적이고 매력적인 배우이다. <블러드 앤 골드> 추천한다.”
“30년 영화감독, 누적 5200만 관객동원”
“영화를 만들면서 한 번도 흥행을 목표로 생각한 적은 없다. 그건 결과가 보여주는 현상일 뿐이다. (흥행이) 되면 좋고, 안 되면 힘든 것이다. 성공도 실패도 다 해보니 느낀 것은 이런 ‘플레이’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다. 가수들이 설 수 있는 무대가 있으면 행복하다고 이야기한다. 나도 그렇다. 대중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이게 언제까지 될지는 모른다. 내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일희일비 하지 않는다.”
“요즘 동료 만나면 걱정을 많이 한다. 우리는 1990년대부터 관객들의 응원을 받으며 일을 해왔다. 실패를 해도 다음 영화를 지지해 주었다. 그런데 후배들을 보면 상황이 그렇지 못하다. 박스오피스에서 꺾이면, 실패하면 비난하고 밟는 경우도 있다. 내가 하는 말 중에 ‘재능이 없는 게 죄가 아닌데’ 말이다. 누구나 최선을 다해 만든다. 제 고민은 정말 재밌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어쨌든 이 영화라는 놀이터에서 다시 놀 수 있게 해야 한다. 형들이 깨진 유리도 치우고, 벗겨진 곳에 니스도 칠하고. 그래서 놀이터를 잘 물러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한다. 최근에 서독제(서울독립영화제) 심사를 하면 깜짝 놀랄 재능을 가진 후배를 많이 볼 수 있었다. 내 첫 영화가 극장에 걸린 게 2000년이다. 그러니 많은 영화팬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류승완 감독이었다면 그것이 또 얼마나 질리겠는가. 새로운 재능의 신인감독과 작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류승완 감독
“난 친구가 없다. 그냥 영화를 만들며 산다. 영화를 만들 때 사람도 만난다. 타인과 소통하고 살아가는 유일한 방식이다. 예전에 이창동 감독님이 제 손을 잡으며 너무 애쓰지 말라고도 하시더라. 이젠 좀 심플해져야겠다고 생각한다. 해보고 싶은 것 다해 봤으니. 이젠 본질로 돌아가서, 작지만 재밌는 것 해보고 싶다. 젊었을 때는 영화보다 내가 더 인정받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인간극장>에 출연할 충무로감독을 꼽으라면 단연 류승완일 것이다. 어린 시절 동생(류승범)과 함께 성룡 액션영화를 보며 오로지 영화의 꿈을 키운 사람이다. 충무로 연출부 생활을 하며 ‘자투리 필름과 초초저예산’으로 단편을 만들며 미래를 만들어나갔다. 그의 첫 영화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나 그에 포함된 단편 <패싸움>이 아니다. 1996년 단편 <변질헤드>를 찍었었다. 놀랍게도 장준환이 촬영을, 이무영이 배우로, (지금은 아내이자 위대한 조력자인 외유내강의) 강혜정이 기획한 단편이다. 이 영화는 이후 공개된 적이 없다. 인터뷰 끝나고 <변질헤드>를 볼 방법이 없냐고 물어보았다. ”안 돼요. 정말 공개하고 싶지 않은 작품입니다.“라고 했다. <휴민트>보다 더 궁금하고, <베를린2> 보다 더 기대되는 것이 <변질헤드>이다.
[사진=NE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