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란
1945년 해방의 기쁨도 잠시, 제주도는 이데올로기의 광풍에 휩싸였다.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시작되어 수년간 이어진 '제주 4·3사건'은 수많은 양민이 영문도 모른 채 희생당한 비극의 역사다. 하명미 감독의 영화 <한란>은 이 참혹한 현장 속에 내몰린 제주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의 상처를 응시한다.
영화는 여섯 살 소녀 해생과 엄마 아진의 엇갈린 운명을 따라간다. 아버지는 소식이 끊기고, 엄마 아진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산으로 향한다. 그사이 군인들이 들이닥쳐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해생은 엄마를 찾아 험난한 산길에 오른다. 영화는 '빨갱이'라는 낙인이 생과 사를 가르던 잔혹한 현실 속에서, 오직 생존과 재회를 위해 사투를 벌이는 모녀의 모습을 절절하게 그려낸다.
<한란>은 기존의 4·3 영화들과 궤를 같이하면서도 역사적 균형감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 광범위한 양민학살의 실태와 미군정의 방관을 지적하는 동시에, 이념을 앞세운 무장대의 비인간적인 면모 또한 놓치지 않는다. 특히 "우리가 하는 행동은 다르다"며 피의 복수를 합리화하는 빨치산의 대사는 전쟁과 혁명이라는 대의명분 아래 개인의 삶이 얼마나 처참히 부서지는지를 역설한다.
가장 인상적인 상징은 'US ARMY'가 선명히 찍힌 목줄을 한 세퍼드다. 산속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모녀의 위기를 지켜보는 이 개의 시선은, 제주도의 비극을 방관하고 기억하는 역사의 목격자처럼 느껴진다. 고립된 섬에서 벌어진 이 거대한 비극을 배우들은 제주 방언의 열정으로 살아냈고, 관객은 그들의 고난을 통해 비로소 4·3의 아픔에 가닿는다. 과거의 교훈 없이는 미래의 비극을 막을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영화는 제주 산야의 서늘한 공기와 함께 전한다. (박재환영화리뷰.800자리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