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씨고아
고선웅이 각색과 연출을 맡은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인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이 최근 다시 무대에 올랐다. ‘조씨고아’는 2015년, 명동예술극장에서 처음 선을 보인 뒤 꾸준히 무대에 올랐고 이번에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10주년 공연을 맞이한 것이다. 캐릭터와 스토리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드라마틱한 전개로 오랫동안 공연 팬들의 사랑을 받아온 작품답게 이번 공연도 연일 매진을 자랑했다.
‘조씨고아’는 중국 원(元)나라의 기군상(纪君祥)이 쓴 희곡 <조씨고아>의 이야기를 판본으로 한 작품이다. 작가는 중국의 역사서에 나오는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바탕으로 이 작품을 완성했다.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은 중국의 춘추시대, 진(晉)나라 때 일이다. 진의 영공(靈公)은 문신 조순과 무신 도안고의 보좌를 받으면 집권하고 있었다. 횡포한 도안고가 야심을 드러내며 이야기는 진행된다. (‘춘추’시대라 하면, 주(周)의 왕이 형식적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가운데 제후국의 공(公)들이 자기들의 영역을 책임지던 시절이었다. 그리곤 그들이 마구 싸우던 ‘전국’시대를 거쳐 결국 시황제가 중원을 통일하게 되는 것이다)
조씨고아
야심가 도안고는 충신 조순이 역모를 꾸민다고 상소하고 이를 빌미로 조씨 집안의 ‘9족’을 멸한다. 9족이 어디까지인지는 복잡한데 친가-외가-처가에 걸쳐 거의 모든 피붙이를 도륙하는 것이다. 여하튼 도안고는 조순 집안과 관계되는 300명을 다 죽인다. 그런데, 드라마틱하게 한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도안고의 명을 받은 한궐 장군이 조씨 집안을 완전도륙내지만, 조순의 아들(조삭)의 처(姬)가 낳은 갓난아기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 것이다. 조씨 집안을 드나들던 의원 정영이 그 갓난아기를 책임지게된 것이다. 정영은 수많은 사람의 희생 속에 아이를 가까스로 빼돌린다. 하지만 도안고는 전국의 갓난아기를 다 죽이라고 명한 상태이다. 정영에게도 갓 낳은 아이가 있었다. 이제 정영은 조씨 집안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갓난아이를 살리기 위해 끔찍한 선택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아이 때문에 희생당한 많은 사람을 위해 오랫동안 복수를 준비한다. 그 아이,조씨고아가 다 자랄 동안 말이다.
중국역사에서 뽑아낸 이 이야기는 정말 드라마틱하다. 한 집안을 몰살시키는데 그 광풍 속에 한 아이가 살아남은 것이다. 의원 정영은 그 광풍 속에 휩쓸리면서 끔찍한 역사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아이’의 아버지는 사약을 받고, ‘아이’의 엄마는 목을 매 죽고, ‘아이’를 죽이려온 장군(한궐)은 아이의 탈출을 눈감아주고는 자결한다. 그리고, 아이를 숨겨준 충신(공손저구)은 끝내 죽으면서도 아이를 지킨다. 그 모든 희생을 보면서 ‘정영’은 약속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이 아이를 제가 꼭 지켜내겠습니다.”고. 그리고 마지막 단계. 정영의 선택은 자기의 아이와 그 아이를 바꿔치기 하고, 자신의 아이를 희생시킨다. 이에 정영의 아내도 자살한다. ‘정영’은 이제 자신의 자식도, 자신의 아내마저 희생시킨 것이다. 오직, ‘조순 대감’의 남겨진 피붙이를 위해. <조씨고아>의 전반부는 ‘피붙이 아이’를 둘러싼 긴박감 넘치는 살육과 도피 과정이 펼쳐진다.
조씨고아
그리고 이어지는 후반부에서는 또 한 번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도안고는 ‘정영의 갓난아기’(실제는 조씨고아)를 양자로 들여 알뜰히 키운다. 자신의 후계자로, 장군의 재목으로. 그리고. 그 아이가 다 장성한 뒤, 정영은 그제야 오랫동안 가슴에 꽁꽁 숨겨두었던 진실을 말해준다. “넌, 내 친자식이 아니다. 억울하게 죽은 조순의 손자, 조석의 아들이다. 너 하나를 살리기 위해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고. 어제까지 정영을 친부로 모시고, 도안고를 양부로 따랐던 ‘아들’은 혼란에 빠지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는 결국 분연히 칼을 뽑아드는 것이다. “다스베이더가 나쁜 놈이구나!” 아버지 ‘정영’의 피눈물과 아들 ‘조씨고아’의 심연의 슬픔이 폭풍처럼 관객에게 들이닥치는 순간이다.
<조씨고아>는 중국에서는 인기 레퍼토리이다. <패왕별희>의 진개가(천카이거) 감독이 갈우, 왕학근, 황효명, 판빙빙을 캐스팅하여 영화(2010)로 만들기도 했다. <조씨고아>는 중국 고대사에서 뽑아낸 ‘이야기’이다. 봉건제 체제의 궁중극을 기본으로 충성과 효도의 문제를 다룬다. 그리고 2000년 넘게 내려온 인간본성의 문제를 내던진다. 정영은 왜 그런 과제를 떠안았을까. 그것이 ‘군자의 약속’일까, ‘희생에 대한 참여’일까. 얼굴도 모르는 오래된 사연의 복수극에서 진짜 주인공이 되는 ‘조씨고아’의 심리는. 관객들은 드라마틱한 이야기에 매료되어 극장문을 나서게 된다.
이번 <조씨고아> 10주년 공연에서는 하성광(정영), 장두이(도안고), 이호재(영공), 정진각(공손저구), 유순웅(조순) 등이 무대를 ‘역사스페셜’로 만든다. 이번 공연에서는 무대장치가 특별하게 진화했다. 무대 위에 매달린 소도구들이 이야기 진행에 적절하게 이용된다. 비극 일변의 이야기지만 고선웅은 많은 부분을 희극적으로, 활기차게 무대를 채운다. 특히 후반부 조씨고아가 각성하는 부분은 장구한 복수의 사연을 압축적으로 잘 보여준다. ‘조씨고아’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지만 인간본성을 다룬 드라마답게 더 진화할 것으로 기대된다. (리뷰 박재환)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원작:기군상 ▶각색·연출 고선웅 ▶번역·드라마투르기:오수경 ▶출연: 하성광, 장두이, 정진각, 이호재, 유순웅, 조연호, 이지현, 이현훈, 박승화 ▶주최:국립극장, (재)국립극단▶공연: 해오름극장/ 2025년 11월21일~11월30일 ▶공연시간: 150분 (휴식 15분 포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