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번 출구
똑같은 하루이다. 잠이 덜 깬 상태로 붐비는 지하철을 타고 오늘도 선 채로 일터로 향한다. 모바일 쇼츠영상을 무심하게 쳐다보며, 이어폰으로 세상과 단절된 채로. 지하철에 어떤 사람들이 탔고, 지금 저 임산부석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이 없다. 지하철에 내려서 인파에 떠밀려 계단을 오른다. 전화가 온다. 일방적인 통보이다. 인파 속에서 주춤한다. 이쪽 방향인가 저쪽 방향인가.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기만 한다. 어디가 잘못 되었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지하철을 잘못 탄 것인가, 6호선이 아닌가? 삼각지역을 통과했는가? 이어폰 때문에, 쇼츠 영상 때문에, 지하철에서 임산부석에 앉은 저 남자를 놓친 것인가. 다시 돌아간다. 이번엔 디지털미디어시티역이다. 그런데 6호선인가, 경의중앙선인가, 공항철도인가. 이 남자는 오늘도 헤맨다. 지난 달 개봉된 일본영화 <8번출구>는 지하철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역사 안에서 무한루프에 빠진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는 무슨 생각에 빠져, 어떤 사연으로 헤매는 것일까. 안내표지판을 보라. ‘8번출구’를 찾아야한다.
지난 달 개봉된 카와무라 겐키 감독의 일본영화 <8번출구>는 동명의 게임을 원작으로 한다. 게임은 리얼하면서도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펼쳐지는 리미널(liminal) 스페이스 게임이다. 일상에 익숙한 지하철 지하보도를 끝없이 걸어간다. 벽에 붙은 포스터, 안내표지판, 조명,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봐야한다. ‘다른 모습’이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니 돌아서서 다른 길로 가야한다. 일종의 ‘숨은 그림 찾기’이다. 이 제한된 공간에서, 구분하기 힘든 배경에서, 몇 안 되는 등장인물로 영화를 만든다고? 탈출이 목표인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캐릭터의 고뇌와 일본인의 집단의식을 녹여낸다고? 영화 <8번출구>는 그 어려운 미션을 하는 작품이다. 관객은 라벨의 ‘볼레로’ 음악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다른 승객을 무시하고, 자신이 내려야할 역에서 내려 제 갈 길을 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뭔가 놓쳤다. 무엇일까. 다시 본다. 처음부터.
8번 출구
천식이 있는 남자(니노미야 카즈나리)는 지하철에서 내려 밖으로 나가는 도중에 헤어진 여친(코마츠 나나)의 전화를 받는다. "병원이야. 아기가 생겼대. 어떻게 해야 하지?" 남자는 파견근로자다. 오늘도 '10시까지 어디로 가라'는 문자를 받고 일터로 가는 길이었다. 복잡한 심사의 남자는 곧 무한루프에 빠져 헤매기 시작한다. 저쪽에서 '걷는 남자'(코우치 야마토)가 끝없이 이곳을 맴돌고 있다. 이어 여고생(하나세 코토네)이 "우리, 이미 죽은 것 아닌가요?"란다. '헤매는 남자'는 소년(아사누마 나루)과 함께 '8번출구'를 찾기 위해 '숨은그림찾기'에 나선다. 어딘가 달라졌는지, 무엇이 다른지, 왜 놓쳤는지.
관객은 어느새 극중 인물이 되어 '게임의 룰'을 숙지하고 함께 이변(異變,이상현상)을 찾기 시작한다. 그런 몇 번의 과정을 거치며 그 인물의 과거와 사연을 어느 정도 캐치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거는 어느새 현재가 되고, 미래가 된다. 무한루프 속에서 ‘헤매는 남자’는 과거를 만나고, 현재를 받아들이고, 미래를 만나는 것이다. 그것을 제대로 알아채면 게임은 단순한 탈출게임이 아니라 영혼의 치유가 되고, 가족의 운명이 되는 것이다.
관객은 지하철 무뢰한을 애써 무시하는 남자를 통해, 복잡한 사안을 떠안은 남자를 통해, 숨은 그림 찾기라는 숙제를 풀어야하는 남자를 통해 인생의 올바른 길을 가르쳐준다. 그것은 용기이며, 책임이다. 꽤 괜찮은,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이다.
참, 라벨의 ‘볼레로’를 왜 선택했을까. 그 곡은 단순하게 반복되면서도 최고의 효과를 끌어내는 미니멀리즘 곡이다. 어쩌면 같은 멜로리에서 시작되어 조용히 사라지고, 어느새 합쳐지고, 끝없이 이어지는 이 이야기에 너무나 어울린다. (Reviewed by 박재환)
▶ 8번출구 (8番出口/Exit 8) ▶감독: 카와무라 겐키 ▶각본: 히라세 켄타로, 카와무라 겐키 ▶원작: KOTAKE CREATE - 게임 〈8번 출구〉 ▶출연: 니노미야 카즈나리, 코마츠 나나, 하나세 코토네, 코우치 야마토, 아사누마 나루 ▶촬영: 이마무라 케이스케 ▶음악: 나카타 야스타카, 아미모리 쇼헤이 ▶수입:미디어캐슬 ▶개봉:2025년10월22일/12세이상관람가/95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