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니아
장준환 감독의 2003년 작 <지구를 지켜라!>가 20여 년의 세월을 건너 할리우드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리스의 거장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과 배우 엠마 스톤이 손을 잡은 <부고니아>는 원작의 기발한 상상력을 할리우드식 서스펜스와 블랙코미디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영화는 사라지는 꿀벌과 환경 파괴라는 현실적 공포 위에, 외계인의 침공이라는 음모론을 정교하게 덧칠하며 관객을 기묘한 긴장감 속으로 몰아넣는다.
양봉업자 테디(제시 플레먼스)는 꿀벌의 군집 붕괴 현상이 외계인의 생체 실험 때문이라 믿는 인물이다. 그는 바이오 기업 CEO 미셀(엠마 스톤)을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으로 지목하고 납치한다. 두 손과 발이 묶인 미셀은 살기 위해 지적인 설득과 명연기를 펼치고, 광기에 사로잡힌 테디는 자신의 음모론을 증명하려 사투를 벌인다. 영화 제목 '부고니아'는 소의 사체에서 벌이 생겨난다는 고대 그리스의 비과학적 믿음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진실과 허구가 뒤섞인 영화의 혼란스러운 세계관을 관통하는 상징이다.
제시 플레먼스와 엠마 스톤의 연기 대결은 압권이다. 테디는 상상과 광기로 무장한 채 미셀을 압박하고, 미셀은 기업가 특유의 논리와 냉철함으로 탈출의 기회를 엿본다. 처음엔 악덕 기업을 상대로 한 하층 노동자의 반자본주의 투쟁처럼 보였던 소동극은, 시간이 흐를수록 인류의 운명을 건 거대한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확장된다. 특히 자폐 증세가 있는 사촌 '돈' 역에 실제 신경 다양성 배우인 에이단 델비스를 캐스팅하여 원작보다 입체적인 인물 관계를 형성한 점이 돋보인다.
<부고니아>는 원작의 골격을 유지하면서도 요르고스 란티모스 특유의 차가운 유머와 날카로운 통찰을 잃지 않는다. 기괴한 음모론 뒤에 숨겨진 인간의 소외와 환경 파괴에 대한 경고는 원작보다 더 짙은 페이소스를 남긴다. 파격적인 엔딩과 종의 절멸에 관한 묵직한 메시지는 이 영화가 단순한 리메이크를 넘어선 독창적인 예술품임을 증명한다. CJ가 미처 지키지 못했던 흥행의 전선을, 란티모스와 엠마 스톤이 비로소 지켜낸 듯하다. (박재환영화리뷰.800자리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