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
박찬욱 감독에겐 '깐느 박'이라는 닉네임이 있다. 박 감독은 칸 국제영화제에서 '올드보이'(2024)로 심사위원대상, '박쥐'(2009)로 심사위원상, '헤어질 결심'(2023)으로 감독상을 각각 수상했었다. 그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는 칸 대신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되었고, 이어 토론토와 부산을 거쳐 한국에서 개봉되었다. 한국의 극장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 ‘국가대표’ 영화감독 박찬욱의 신작을 기대하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영화는 그의 ‘변태’적 심미안은 다소 줄고, 캐릭터와 상황이 그려내는 유머는 조금 늘어난 듯하다. 왕관의 무게가 백만 톤은 될듯한 그를 만나 ’어쩔수가없다‘는 영화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담담하다. 개봉일 예매 스코어만으로 판단하기엔 섣부르다. 영화는 자기 운명이 정해진 대로 갈 것이다. 주위의 기대치는 부담스럽다. 평소에는 한국영화의 미래를 걸머진 것 같은 생각은 하지 않는데, 이런 시기에 이 영화가 개봉되어서 말이다.”
Q. 마지막 장면이 무성한 나무들을 벌목하는 장면이다.
▶박찬욱 감독: “이번 영화를 집에서 시작하여 벌목 작업하는 조림지에서 끝내고 싶었다. 마지막에 주인공 만수(이병헌)는 자동화된 공장에서 AI(자동주행차량) 로봇과 마주친다. 혼자 환호하는 장면에서 끝나야하는 영화이다. 그런 장면이 만수의 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Q. 만수의 집은 어떤가. 미술이나 미장센에 신경을 많이 쓴 공간이다.
▶박찬욱 감독: “만수의 아버지가 돼지농장을 크게 할 때, 그 시절 돈을 갑자기 많이 번 사람들이 지었을 만한 집이다. 유럽의 건축양식을 막연하게 동경하며 지은 집이다. 실제 세련된 양식은 아니다. 그냥 잡탕식으로, 똑같은 도면으로 쉽게 지은 모델이다. 세월이 흘러 만수가 고치고 손을 본 모습이다. 당시의 건축가는 싫어했겠지만 지금 와서 보면 기묘한 레트로 스타일이다. 족보가 없는 혼종의 양식이기에 묘한 매력이 있다. 그리고 당시 튼튼하게 잘 지어졌기에 지금 고쳐서 계속 살고 싶어지는 것이다.”
Q. 이병헌이 연기하는 ‘유만수’ 이름에서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떠올랐다.
▶박찬욱 감독: “그 이름은 영어 자막을 고려해서 지은 것이다. ‘유’는 ‘당신’, ‘만’은 ‘맨’이라고 쓸 수 있으니까. 남성성을 탐구하는 영화로서 지은 것이다. 극중에서 원노(김형묵)가 ‘유지보수만 수차례’라는 대사를 하는데 그 배우의 즉흥대사였다. ‘오대수’에서 영감을 받은 것 같다. 김형묵 배우는 이번에 처음 만난 배우이지만 연기도 잘 하고, 생각도 적극적이었다. 그가 영화에 처음 등장할 때 차에서 내리며 립밤을 바르는데 그것도 그 친구 아이디어였다. 키가 꽤 크다. 이병헌과 대조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런 키 큰 사람이 조그만 립밤 바르는 것도 웃기고, 그 캐릭터에 맞는 것 같다.”
Q. 자본주의 풍자와 함께 인간에 대한 연민이 느껴진다는 평가.
▶박찬욱 감독: “물론 영화의 기본설정은 자본주의 체제의 사람은 어떤 욕망과 심정으로 사는지, 그것에 대한 풍자가 있다. 그런 세팅 안에서 사람을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영화는 사회적 이슈를 다루고 있지만 영화는 결국 개인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취직은 해야 하겠는데 무엇을 위한 취직일까. 여기 나오는 사람들 밥을 굶을 정도는 아니다. 극중 대사에 ‘집이라도 팔고, 마트에서 짐이라도 나르지’라는 대사도 있다. 자기 생활수준을 유지하려는 중산층의 욕망이다. 인터넷 시대에는 주변사람, 타인과 비교되기 쉽다. 요만큼도 전락하기 싫어한다. 집도 지켜야하고, 첼로 레슨도 계속 받아야하고, 그런 삶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세 사람을 죽여야 할만큼 가치가 있는지 계속 질문을 던진다. 한편으로는 이해도 된다. 살인까지는 모르겠지만. 그 경계선의 만수 편을 들었다가 말았다가 하는 것이다.”
Q. 그런데 만수는 노동자 계급을 대표한다고 보기 어렵다. 기만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박찬욱 감독: “만수가 더 많은 층까지 대표하는지는 모르겠다.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비율이 높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계급간의 갈등이나 전쟁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계급, 중간계급 안에서 경쟁하고 죽고 죽이는 더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불쌍하게도 해고되어 소송을 펼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노동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그 회사에 왜 노조가 없었는지 모르겠다. 많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지만 거시적으로 봤을 때는 안타까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지 않는다. 좁은 시야에 갇힌 것이다. 인간 경쟁자를 없애니 AI가 설치는 허망한 이야기이다.”
박찬욱 감독
Q. 손예진이 연기하는 미리는 어떤 인물인가.
▶박찬욱 감독: “미리는 확실히 낙천적인 사람이다. 즐겁게 사는 사람이다. 취미도 많다. 댄스를 하는데 그건 자기를 아름답게, 예쁘게 보이려는 것이다. 농담도 잘 하고 장난도 잘 치는, 남편보다 시야가 넓고 현실적이다. 처음엔 남편 말을 믿고 퇴직금으로 살다보니 위기에 몰린다. 상황이 악화되자 취업을 한다. 그러면서도 댄스 파티에는 가고 싶어 하는 그런 보통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미리는 남편과 가족을 생각한다. 성숙한 사람이다.”
Q.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멜로이기도 하다. 미리와 만수를 보면.
▶박찬욱 감독: “손예진이 들어오면서 미리의 분량이 늘어난 부분도 있지만 똑같은 한 줄이라도 좀 더 함축적인 대사를 시도하기도 했다. 손예진이 출연하기도 했을 때 ‘친구들이 이 영화 보고 나서, 왜 출연했어?’라고만 묻지 않게 찍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기 위해 정말 끝없이 노력했다. 편집, 후시녹음할 때까지. 손예진 배우 친구 유명하잖은가. 멜로드라마는 맞는데, 끝에 가서 이들 부부가 어떻게 될지는 저는 유보적이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용서하고, 끌어안는 가족의 회복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곧 결별을 선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 명이 죽인 애 아빠와 같이 살 순 없잖은가. 그 집엔 사과나무가 있잖은가. 누가 그 집 사서 땅이라도 파면.”
Q. 사용된 권총에 대해서. 월남전에서 흘러온 권총이라는 설정에 대해 설명해 달라.
▶박찬욱 감독: “그 권총을 사실 더 큰 역할을 한다. 실제 촬영까지 했었다. 형사(오달수)가 찾아와서 ‘국정원이 개입했으니 범인이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말한다. 만수는 뭔 소리야 표정을 짓는다. ‘북한 총 때문에?’ 이야기는 ‘조폐공사 입찰’에 포커스가 간다. 아리(염혜란)는 남편(이성민)의 잠꼬대 이야기를 한다. 만수는 이런 압도적인 부조림함으로 봐서 자기에게는 협의가 없겠다고 생각한다. 국정원이라는 유능한 조직까지 들어오면 어처구니가 없을 것 같다. 촬영까지 했다가 고쳤다. 그 부조리함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들이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 물론, 베트남전에 북한이 비공식적으로 참전했고, 무기도 유입되었다는 가능성을 둔 부분이다.”
'어쩔수가없다'
Q. 소품 중 관객이 놓칠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
▶박찬욱 감독: “글쎄. 아라가 범모 죽일 때 입고 있는 빨간 색 브이넥 스웨터. 형사가 두 번째 만수 집을 찾았을 때 유심히 보면 미리도 같은 디자인의 옷이다. 색깔만 파란색. 두 사람의 연결점을 암시하려고 했다.”
Q. 조용필의 <고추잠자리>가 획기적으로 사용되었다.
▶박찬욱 감독: “미국이나 영국 영화를 보면 명곡들이 많이 쓰인다. 비틀즈 곡 같은 곡. 다 옛날 가수들의 노래이다. 우리는 그런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게 아쉬웠다. 기회가 있을 때 소개를 많이 하고 싶었다. 조용필 곡을 사용하기로 했고, 어떤 노래를 쓸 것인가로 고민을 많이 했다. 각본 쓸 때, 찍을 때 많은 노래를 털어보았다. 가사와 리듬을 계산해보았는데 ‘고추잠자리’가 제일 잘 어울렸다. 아이러니한 점도 있고. 시원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를 다 사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영화에서 노래를 쓸 때는 짧게 쓰거나 볼륨을 줄여야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 후련하게 사용했다. 기분이 좋았다.”
Q. 모차르트 곡은?
▶박찬욱 감독: “2009년에 시나리오를 처음 쓸 때, 첫 신에 그걸 사용하기로 마음먹었었다. 피아노 독주 하다가 오케스트라가 시작되고, 동시에 컷 되면, 하늘이 보이고 태양과 구름이 보인다가 시나리오 첫 줄이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K.488)이 사용된다**)
Q. 코미디 요소에 대한 생각.
▶박찬욱 감독: “제 영화를 보면서 어떤 분들은 진지한 태도로 심각하게만 보시더라. 하지만 저는 군데군데 픽하고 웃을 수 있는 시도를 항상 해왔었다. 어느 정도는 블랙코미디적 성격을 띠고 있지만 이번에 코미디 쪽으로 다이얼이 조금 더 간 것이다. 이게 그렇게 획기적인 변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 영화를 보고 관객이 웃어줄까? 정말 어려운 것이다. 시나리오 쓰면서, 찍으면서 ‘이 장면 안 웃으면 어쩌나’ 식은땀이 난다. 농담했는데 안 웃을 때처럼 겸연쩍은 경우가 어딨나. 그래서 찍으면서 물어보고 신경 썼다. 물론 누가 뭐라고 해도 이건 할거야 하고 찍은 장면도 있다.”
Q. ‘관객이 좋아할’ 영화에 대한 고민은 하는지.
▶박찬욱 감독: “오로지 그 고민밖에 안한다. 영화 찍으면서 하는 첫 번째 생각은 이걸 과연 관객이 이해할까, 나와 함께 갈 수 있을까, 좋아할까 이다. 그게 단순하게 웃거나 환호하고 박수치고 그런 것만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역겨워하기도 하고, 눈을 가릴 수도 있지만 그런 것조차 재밌어하는 부분일 수 있다. 그런 감정이 바탕이 되어 큰 감동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관객이 이해 못할 장면, 즐길 수 없는 영화를 왜 만들겠는가. 다 사랑받고, 이해받고 싶은 거지. 오래 살아남아 다음, 다다음 세대까지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만들려고 한다.”
박찬욱 감독
Q. “와라, 가을아” 대사에 대해.
▶박찬욱 감독: “모든 게 만수는 식물인간이라는 점에서 출발했다. 원작에는 없었지만 캐릭터를 구축할 때 그는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설정했다. 류성희 미술감독이 합류하자마자 제일 먼저 단풍을 찍어야한다고 했다. 일정 때문에 단풍을 담기가 쉽지가 않았다. 제대로 담으려면 서둘러야했다. 식물에 집착하는 주인공이기에 시간에 따른 식물의 변화를 잘 보여줘야 했다. 여름의 따가운 매미소리, 가을의 나무 이파리. 만수가 절정의 행복감을 느낄 때의 나무는 어떤 모습일까.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이기에 흐뭇한 마음으로 가을을 기다릴 것이다. 그런데 그를 기다리는 가을은 그런 가을이 아니다. 낙엽과 단풍. 비가 내린다. 일기예보에는 이 비가 그치면 겨울이 온다고 그런다.”
Q. 분재에 대해.
▶박찬욱 감독: 모든 것이 류성희 미술감독 때문이다. 식물인간이기에 온실을 지어야했고, 온실을 어떻게 꾸밀 것인가 고민했다. 분재를 취미로 가지면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기왕 분재를 쓸 것이면 장식으로만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 더 활용하자고 했다. 영화는 경제적으로 찍는 것이다. 분재라는 것은 식물을 가꾸는 동시에 인위적으로 구부리는 폭력의 행위가 수반된다. 문 제지의 선출(박희순)의 유튜브를 보다가 만수가 부러뜨린다. 폭력적 행위를 예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체를 처리할 때도 활용된다. 잔인하다고? 전기톱보다는 낫지 않은가?“ (하하하)
“제목은 원작의 <엑스>를 그대로 옮긴 <모가지>를 생각했다가 <어쩔수가없다>로 지었다. 예전에 <아가씨>때에도 김태리가 ‘아가씨’ 부르는 신 쓰다가 제목으로 정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도. 그 말을 자주하는데 한 단어같이 툭 튀어나온다. 감탄사 같다. 그래서 붙여서 표기한 것이다.”
[사진=CJ EN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