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관 - 영향 아래 있는 남자 (정주리 감독,2007)
다음 주 제 30회 부산국제영화제가 막을 올린다. 내일의 봉준호와 박찬욱을 기대하게 하는 독립/단편영화를 만나볼 수 있는 KBS 1TV [독립영화관]에서는 부산영화제 개막을 앞두고 ‘부산국제영화제 수상작 특별전’을 마련했다. 정주리 감독의 <영향 아래 있는 남자>, 손태겸 감독의 <여름방학>, 곽은미 감독의 <대자보>가 시청자를 찾는다. 방송은 밤 11시 30분이다.
여름 한낮. 혼자 긴옷을 입은 병구(구본진)는 연신 기침을 하며 길을 걷는다. 꼭 붙은 커플과 길에서 마주치자 어느 쪽으로 비켜서야할지 순간 당황한다. 그러곤 부귀영화의 ‘부귀’ 글자가 떨어져나간 영화식당을 발견한다. 으슥한 지하로 이어진 허름한 분식식당이다. 켜놓은 TV에선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사장(정석용)은 단무지 반찬을 던지듯 내놓고는 말없이 쳐다본다. 더러운 식당 한쪽 벽에는 [물은 셀프]가 붙어있다. 겨우 ‘김치볶음밥’을 시키지만 곧 이 식당이 그렇게 마음 편한 식당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식당 주인과 주방아줌마는 불친절하고, 서비스는 형편없고, 식당 손님들은 무례하기 그지없다. 식당 주인은 손님이 음식 남긴 것에 대해 구시렁거리는 수준을 넘어 불평과 욕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조용히 앉아, 잔뜩 쫄려 숟가락질을 하는 병구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사장의 말 한 마디에 깜짝깜짝 놀라며 자기가 시킨 음식을 꾸역꾸역 먹으며 그 그릇을 깨끗이 비워야 한다. 한소리 듣지 않기 위해, 이 식당에서 무사히 나가기 위해서는. 접시에 뭔가 께름칙한 것이 섞여있어도 말이다.
독립영화관 - 영향 아래 있는 남자 (정주리 감독,2007)
영화는 소시민 쫄보가 험악한 상황에 마주치게 되었을 때 본능적으로 주춤거리며, 방어적이며, 위축되는 심리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제 돈 내고 제가 사먹는 식당 방에서조차 눈치를 봐야하는 상황이라니. ‘손님’ 병구는 첫 등장에서부터 계절과 어울리지 않은 옷차림에 어딘가 굉장히 위축된 인물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이제는 ‘욕쟁이 식당’이 낭만이던 시절은 사라졌다. 손님은 왕은 못 되더라도 ‘을’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정주리 감독은 그런 요식업자들의 서비스 정신을 풍자하려고 이 영화를 만든 것이 아닐 것이다. 누구나 위축된 상황에서, 특별한 공간에 갇히게 되면 ‘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식당주인을 연기한 정석용 배우는 순하게 생긴 얼굴의 뒷면에 숨겨진 무서운 카리스마를 느끼게 한다. (넷플릭스 <디.피>의 오민우 준위!)
<영향아래 있는 남자>는 14분 단편영화이지만 드라마는 밀도 있게 꽉 차 있다. 텔레비전의 소음과 윙윙 거리는 선풍기와 환풍기 소리가 긴장감과 위축감을 더한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식당에서 밥을 먹던 외국인의 대화가 흥미롭다. 누가 텔레비전을 발명했는지 아느냐면서 우즈베키스탄에 사는 러시아태생 과학자가 처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나눈다. 찾아보니 1928년, 보리스 그라보프스키가 이끄는 소련과학자 그룹이 타슈켄트에서 수년간의 연구 끝에 미래의 텔레비전 형태가 되는 시제품 '텔레포트'(Telefot-Televiziya) 장치를 개발했단다. 이들은 그라보프스키의 동지(동료) 이반 벨랸스키가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움직이는 모습을 20미터 거리까지 전송하는데, 얼마 후엔 운행 중인 전차의 영상을 전송하는데도 성공했단다. 이 발명품(시제품)은 모스크바로 운송되는 중 무슨 이유에서인지 망가졌다고 한다. 텔레비전의 역사에서 잊힌 순간이 되었지만 ‘영상을 무선으로 송출하는 후대의 전자식 텔레비전 시스템’의 프로토타입 기술을 보여준다.
<영향아래 있는 남자>는 <도희야>(2014)와 <다음 소희>(2023)를 감독한 정주리 감독이 2007년에 만든 단편영화이다. 참, 띄엄띄엄 힘들게 영화를 만든다는 느낌이다. 영화 엔딩 크레딧에 조연출로 ‘박이웅’ 이름이 있다. <불도저에 탄 소녀>와 <아침바다 갈매기는>의 그 박이웅 감독이다. 둘은 부부 영화감독이다. 둘 다 좋은 영화, 괜찮은 영화, 기억해야할 영화를 만드는 영화감독이다. 참, 이 영화는 제12회 부산국제영화제(2007)에서 선재상을 수상했다. (박재환)
▶영향아래 있는 남자 ▶각본/연출: 정주리 ▶제작:서인애 ▶촬영:진현우 ▶조명:유경수 ▶조연출:박이웅 ▶구본진(병구) 정석용 김지연 이장원 ▶제12회 부산국제영화제(2007) 선재상 수상작 ▶14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