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가영 감독
지난 주 막을 내린 제29회 부천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단편영화 <첫여름>은 주체적인 한국 여성의 삶을 이야기할 때 계속 거론될 작품일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주인공은 인생 늘그막의 여인이다. 그 할머니는 '손녀'의 결혼식 날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한다. 허가영 감독을 만나 '할머니의 삶'에 대해 들어보았다. 그리고, 영화학도로서 어떤 궤적을 거쳐 영화감독의 길로 나섰는지 물어보았다. 영화감독은 이렇게 되는 모양이다.
Q. 영화감독의 꿈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허가영 감독: “영화감독이 되기로 한 뚜렷한 계기는 없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로 대학을 간 사람이다. 청소년기 때 저만의 시간이 있었던 것 같다. 가장 많이 한 게 글쓰기였다. 그 때는 내가 사회의 이방인, 아웃사이드 같았다. 내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해방의 공간이 글쓰기였다. 그 때 제가 쓴 글을 토대로 영상을 만들었는데 그게 영화를 만든다는 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청소년 UCC공모전 같은데 나가면서 사회와 연결되고 소통한다는 것이 좋았다. 나를 실현할 수 있다는 강렬한 느낌이 들었다. 대학 졸업할 때 즈음하여 내가 가장 사랑했던 활동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니 청소년기에 경험한 것이었다. 그래서 영화를 하게 되었다. 아직도 나는 영화감독보다는 작가의 정체성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공동작업을 좋아한다. 영화를 하다보면 예술의 다양한 부분이 모인다. 사진, 미술, 음악. 전 분야가 종합적으로 모여 부대끼는 것이 영화라고 생각한다.”
Q. 글쓰기와 영화 만들기는 스케일이 다를 텐데.
▶허가영 감독: “작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냥 뚜렷한 목적 없이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 글밖에 없었으니. 대학에서 국문과 수업을 청강했다. 시 쓰기 수업 같은. 학교(필름아카데미)에 가려면 자신의 포토폴리오가 있어야했다. 미디어액트에서 수업 듣고 영화를 찍었다. 굉장히 저예산으로 7분 분량의 단편을 찍었다. 40만원 사비를 들여. 제목은 [탕수육을 먹는 방법에 대하여]이다. 태권도 국가대표를 준비하는 단짝 친구가 탕수육 먹는 방법을 두고 싸우다가 갈등구조가 나타난다. 둘의 관계에 상처가 드러나고, 결국 이별하게 된다. 짧으면서, 한 공간에서 대화만 하는 그런 내용이다. 그 작품 찍고 아카데미 지원해서 입학하게 되었다.”
Q. 영화아카데미(KAFA)는 부산에 있다. 그 학교를 선택한 이유가 있는지.
▶허가영 감독: “무식해서 용감했던 것이다. 그렇게까지 경쟁률이 심한 줄 몰랐다. 영화를 찍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반대하셨고, 영화계 동료도 없었다. 영화를 찍고는 싶지만 여건이 안 되어 막막했다. 그때 어떤 분이 아카데미 가면 제작비를 지원해준다는 것이었다. 알아보니 ‘KAFA’가 그랬다. 1년 동안 영화만 찍을 수 있고 제작비를 대준다는 것이다. 돈도 없고, 대학 졸업해서 어디 손도 못 벌리겠고. 하지만 영화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모님과 떨어져서 저를 실험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KAFA 41기 영화연출 전공 허가영이 되었다.”
영화 '첫여름'
Q. 영화는 맘껏 찍었나? 이게 첫 번째 작품인가?
▶허가영 감독: “두 번째, 2학기 졸업 작품이다. 처음 찍었던 실습작품은 [너를 심을 땅]이라는 판타지 드라마이다. 북미 최대 장르영화제인 캐나다 판타지아영화제(Fantasia International Film Festival)에 초청받았다. 월드프리미어로 상영하는데 곧 출국할 예정이다.”
* 허가영 감독의 두 번째 작품 <첫여름>은 지난 5월 열린 칸국제영화제 ‘라 시네프(La Cinef, 학생 경쟁부문)’에 출품되어 한국 최초로 1등상과 신진 여성 감독을 발굴하는 ‘여성의 가치에 빛을(Lights on Women’s Worth) 어워드'를 수상했다. KAFA 실습작 1,2호가 해외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
Q. 칸 상영 때 관객 반응이 어땠는지.
▶허가영 감독:“칸에서는 단편 16편이 출품되었는데, 4작품씩 묶어 상영되었다. <첫여름>은 덴마크, 독일, 미국 감독의 작품과 함께 상영되었다. 관객들이 제 작품을 좋아해줬다. 노인 관객은 많지 않았다. 다른 나라에서 온 작품인데 영화를 보고 삶의 위안을 받았다고 하시더라. 젊은 관객들은 이 영화가 솔직하고, 담백하고, ‘척’하지 않아서, 가식적으로 포장하지 않아서 좋았다고 하더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 같아서 좋았다는 평이 많았다.”
Q. 그럼 이제부터 영화 이야기 좀 해 보자. <첫여름>의 구상은 처음에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허가영 감독: “외할머니 이야기에서 출발했다. 물론 영화는 픽션이다. 캐릭터는 할머니를 떠올리며 쓴 것이다. 할머니가 2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49재에 갔었다. 스님이 대웅전에서 불경을 암송한다. 할머니는 춤을 추시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문득 할머니가 대웅전에서 춤을 추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이미지를 한동안 갖고 있었고, 영화에서 재현하고 싶었다. 원래 장편 아이템을 구상했는데 그건 다음으로 미뤘다. 아카데미 졸업 작품을 준비하면서 단편으로 만들고 싶었다. 할머니가 춤을 사랑하게 된 사연 등을 통해 노인이라는 집단공동체의 이야기를 자연스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노인’이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이야기와 사연이 있다. 노인의 삶 자체를 솔직하게 다룬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Q. 영화 시작부터 인상적인 리듬이 귀를 사로잡는다. 카바레를 가봤는지.
▶허가영 감독: “영화를 준비하며 많이 가봤다. 그 음악은 지루박(Jitterbug)을 재해석한 것이다. 첫 작품 찍을 때 소개받았던 신경철 음악감독님이 만든 것이다. 첫 영화도 너무 좋았기에 이번에 다시 부탁했다.”
Q. 영화에 등장하는 절은 부산 흥국사이다.
▶허가영 감독: “춤을 출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절을 찾아야했다. 30여 군데 사찰을 가보았다. 내가 생각했던 공간 이미지와 가장 어울리는 절이 흥국사였다. 영순이 대웅전 바깥 공간에서 혼자 춤을 추는 장면을 구상했다. 내가 할머니의 환상을 본 것은 대웅전 안이지만 시나리오 쓸 때 생각을 바꿨다. 초고에서는 손녀 시점에서 할머니를 이해하는 과정이 담겼다. 그런데 그렇게 완성하면 영순이라는 캐릭터가 20대 여성(손녀 석윤)이 바라보는 대상으로 소비되는 것 같았다. 이 영화는 영순이가 주인공이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나리오가 완성되었다.”
'첫여름' 촬영 현장
Q. 영순을 연기한 허진 배우는 어떻게 캐스팅하게 되었는지.
▶허가영 감독: “60대가 아닌 70대 여배우를 캐스팅하고 싶었다. 그만큼 캐스팅의 폭이 좁아졌다. 우연히 허진 배우님이 젊은 시절에 연기한 영상을 보게 되었다. 그 분위기, 마스크가 독특하게 느껴졌다. 소속사에 시나리오를 보냈는데 마음에 든다는 연락을 받았다. 미팅을 가졌는데 그때 입고 오신 옷이 영화 초반에 나오는 그런 옷이었다. 영순 같이 보였다. 허 선생님과 한다면 이 영화를 완성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시나리오를 마음에 들어 하셨다. 그동안 전형적인 노인 역할만 하셨던 것 같다. 치매 걸려 병상에 있는 노인 같은. 그래서 영순 배역이 더 흥미로웠던 모양이다.”
Q. 영순의 남편인 정철은 어떤가.
▶허가영 감독: “남편 캐릭터는 영순의 적이며, 가장 큰 방해물이다. 영순의 지난 삶들을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단순한 캐릭터이지만 가부장적 인물이면서도 피해자이기도 하다. 이 인물을 단순하게 고지식한 인물로 그리기보다는 입체적으로 그리고 싶었다. 신선한 마스크가 필요했다. 그런 남편을 전형적으로 그린다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힘을 잃을 것이라 생각했다. 가부장적인 인물이면서도 영순에게 본인의 욕구조차 표현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전문배우가 아니다. 학교(KAFA) 기숙사 앞 편의점 주인이시다. 시나리오 써다가 생각이 막히면 맥주 사러갔었다. 자연스레 친해졌다. 남편 정철의 캐릭터와 비슷한 마스크라고 생각했다. 견뎌온 세월이 보이는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정철을 효율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요청을 드렸는데 흔쾌히 받아주셨다. 리딩을 할 때에도 연기가 좋았다. 촬영을 하면서 전혀 위축 받지 않으셨다.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Q. 노인의 삶을 다룬 것은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2002) 이후 오랜만에 만나보는 것 같다.
▶허가영 감독: “여성 노인의 삶을 세밀하게 그려보려고 했다. 그것이 사랑이나 성 관계를 다룰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삶이 젊은이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누군가 노인들도 그런 사랑을 하고 있을 것이다. 삶을 살아가는 주체인데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한국사회가 노인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야기 하고 있지 않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접근했다.”
'첫여름' 촬영 현장
Q. 허진 배우의 상대 역으로 나온 정인기 배우는 ‘네임드’이다. 캐스팅을 어떻게 성사시켰는지
▶허가영 감독: “그렇게까지 유명한 분이시진 몰랐다. 제가 영화인 경력이 얼마 안 되어. 시나리오 쓸 때 단편 <얼음강>(민용근 감독,2014)을 봤었는데 그 때 모습과 연기가 너무 좋았다. 지금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정도의 나이가 되었으면 어떨까. 소속사에 시나리오를 드렸다. 한 번에 오케이 했다. 제가 ‘국민 연하남’ 만들어 드리겠다며 부탁했다. 작품을 위해 춤 연습도 열심히 해주셨다. 항상 누군가의 아빠 역할만 하다가 누군가의 로맨스 대상이 되는 것이니 배우로서 매력을 느꼈을 것이다. 시나리오가 좋았다. 제 글에 자부심이 있다.”
Q. 부정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카바레나 노인들의 일탈, 제비족 이런 게 먼저 떠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무도장에서 ‘바닥에 떨어진 브로치’ 찾는 장면 전환이 인상적이었다.
▶허가영 감독: “영순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가족과 있을 때의 모습, 댄스 파트너와의 모습도. 카바레에서 이런 여자가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다. 필연적으로 과거 그 때의 모습을 돌아갔을 때, 학수가 그녀에게 어떤 의미인지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그 장면에서 제비족 같이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배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Q. 앞으로 어떤 영화를 찍고 싶은지.
▶허가영 감독: “빨리 장편 영화를 찍고 싶다. <첫여름>처럼 인물을 다루는 영화를 잘 찍고 싶다. 카메라가 인물 옆에 있고 쫒아가는 그런 작품을 찍고 싶다. 관객에게 삶을 체험하게 하는, 캐릭터 무비에 자신이 있다.”
Q. 영순의 남편을 어떤 남자로 그리고 싶었는지.
▶허가영 감독: “영순은 큰 사랑 없이 결혼했다. 하지만 인생 후반부에 (몸이 불편한) 남편을 닦달하는 캐릭터로 그리고 싶지 않았다.” (남편은 영순의 외도(?)를 알고 있나?) “물론 알고 있다. 정철도 외롭고 속상할 텐데,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인물로 그렸다. 악인처럼 그리고 싶지 않았다.”
Q. 남편이 영순의 바깥일을 알고 있다면, 이야기가 더 풍성해진다.
▶허가영 감독: “그 장면이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다. 남편이 나쁜 사람이 아닌데, 비도덕적인 인물이 아니기에. 충분히 영순이의 삶을 보여줬기에 관객들이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밀기보다는 영순의 삶 자체를 이해하고 설득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본인이 선택하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그런 시대를 알고 있다. 그 사회적인 구조 때문에 영순이가 결혼했을 것이다. 그게 온전히 정철의 탓은 아닐 것이다. 그런 부분을 균형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첫여름' 촬영 현장
Q. 사실, 영순이 딸에게 자신의 마음을 쏟아낼 때 하는 대사는 너무나 직설적이다. 아마도, 한국영화에서 처음 보는 모녀간의 대화 신일 듯하다.
▶허가영 감독: “그 씬은 영순이 처음으로 자신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자신의 욕망이 어디로 향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기적으로 비쳐질 수도 있지만 영순의 삶이 이랬어라고 관객을 설득할 수 있는 신이다. 관객들이 영순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을 많이 했다. 그 장면 찍을 때 엄마와 이야기를 나눌 때 나를 가장 절박하게 드러낸 순간을 떠올렸다. 그 때 어떤 심정으로 이야기 했는지,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달라고 간절히 호소할 때의 마음. 그런 감정의 톤으로, 영순의 날 것의 마음을 드러내려고 했다.“
Q. 아무리 좋은 영화라도, 단편영화의 경우는 관객과 만나보기 어렵다. 서독제 등을 통해서나 만나볼 수 있을 것 같다.
▶허가영 감독: “운이 좋게 이 영화는 극장에서 개봉한다. 내달 메가박스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단편 기획전인가? ) “아니다. 이 영화만 단독 개봉한다. 상영시간 30분이고, 입장료는 3천원인 것 같다.”
Q. 앞으로 어떤 영화를 찍고 싶은가. 그리고 요즘 영화/극장이 불황이라고 하는데 소감.
▶허가영 감독: “앞으로 장편을 찍고 싶다. 영화시장이 어려우니 불안할 수밖에. 직업인으로서 영화를 많이 찍고 싶다. 정말이지 다작하는 감독이 되고 싶다. 예산이 큰 영화가 아니더라도, 꾸준히 작품을 찍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
[사진= KAFA, 허가영 감독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