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한테 걸어오던 소리가 기억나."
삶을 살다 보면 나를 가장 폄하하는 존재가 도리어 나 자신이라는 점을 깨달을 때가 있다. 나라는 존재가 남들에 비해 한없이 모자란 것 같아서, 세상의 기준에 비해 가치 없는 것 같아서. 내 삶은 '살고 싶어서 태어났다'가 아닌, 고작 '태어났으니 산다' 정도라며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붙이는 모습을 마주할 때가 있다.
하지만 내가 내 자신을 알아봐 주지 못할 때, 먼저 다가와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나의 인생은, 우리의 인생은 조금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영화 '조제'(감독 김종관)는 어릴 때부터 혼자 책을 읽고 상상하며 자신의 세계를 살아가는 조제(한지민 분)가 우연히 자신을 도와주게 된 청년 영석(남주혁 분)을 만나게 되며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왜 그렇게 먹어? 독이라도 타 놨을까 봐?"
오랫동안 자신만의 울타리를 단단하게 쌓아온 조제는 영석의 호의에 불편함을 내비친다. 휠체어가 쓰러져 일어나지 못할 때도 시종일관 그에게 반말을 하며 경계를 두고, 점차 커져만 가는 영석에 대한 호감을 느끼지만 자신의 감정을 밀어내기만 한다.
그럼에도 영석의 온기는 조제를 끝내 용기 내게 만든다. 자신이 지닌 몸의 불편함을 결점으로, 하나의 자격지심으로 받아들이던 조제는 변화한다. 영석이 챙겨준 음식에도 "쓰레기를 줘서 고맙다"며 퉁명스럽게 말하던 조제는 어느샌가 영석을 "어디 가지 마"라고 붙잡으며 그의 연인으로 자리 잡는다.
영화 '조제'는 남녀 간의 사랑을 넘어 두 남녀의 성장통 또한 새겨진 작품이다.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는 존재가 결코 조제의 장애가 아님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이를 드러낸다. 적어도 영석에게는 조제의 장애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빚지거나, 져줘야 할 이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해서 조제에게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서 있는 연인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조제가 끝내 자신이 갇혀 있던 세계 속에서 벗어나 해방되는 모습, 영석 또한 벗어날 듯 벗어나지지 않던 인생의 함정에서 벗어나 갈피를 잡은 삶을 살아가게 되는 모습은 두 사람의 빛나는 성장을 보여준다. 순간의 연민이었든, 어린 아이의 투정이었든, 두 인물이 느낀 감정에 어떠한 언어를 붙이든 그들 사이의 무언가는 서로를 치유했고 앞을 향해 나아가게 만들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후 관객들은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와 다른 누군가의 불행하고, 연민 가득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타인에게 믿음을 주고, 가까워지고, 살을 맞대다가도 다시 멀어지는 평범한 사랑의 형태임을.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으로 성장해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임을. "때로는 너랑 가장 먼 곳을 가고 싶었어"라고 말하던 조제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이다. (KBS미디어 정지은)
[사진=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