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헤다 가블러'
여기, 한 여자가 있다. 결혼 전에는 아버지의 딸로, 결혼 후에는 남편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어머니로 사는 것이 여성의 행복이라고 여긴다. 그렇지 않은가? 그렇지 않단다. 그 여자는 이제 자기자신의 성장과 해방을 꿈꾼다. 거의 150년 전, 헨리크 입센이 쓴 희곡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이다. 그 후 노라는 여성해방, 여성운동, 페미니즘의 대표로, 혹은 사회변화의 상징으로 곧잘 인용된다. 탄생 200주년(1828년생)을 몇 해 남겨놓은 노르웨이 작가 헨리크 입센의 또 다른 작품 –역시 희곡, 역시 여성서사극- <헤다 가블러>가 무대에 오른다. 공교롭게도 이영애와 이혜영이 주연을 맡은 <헤다 가블러>가 동시에 무대에 오른다. 과연 2025년의 서울에서 만나게 되는 이 작품 속 여성은 어떤 문제를 안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 그 문제를 해결할까. 우선 이영애 버전의 <헤다 가블러>를 본다.
(무대는 노르웨이 크리스티아니아 서쪽 끝의 명망 높은 지역의 한 저택 거실) 테스만 부부가 6개월의 신혼여행에 돌아오기 직전이다. 이 집을 장만하는데 도움을 준 줄리아나 고모와 가정부 베르트가 잡담을 나누고 있다. ‘장군의 딸인 헤다가 어릴 때 말을 타던 이야기, 총을 든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마침내 신혼부부가 이 집에 당도한다. 그들의 대화와 행동, 반응을 통해 헤다의 속내를 조금씩 눈치 채게 된다. 한 때는 아마도 캠퍼스의 인기女였고, 만인(남자)이 떠받드는 헤다였던 모양이다. 그렇게 항상 남성들의 흠모를 받아왔던 헤다지만 이제는 ‘교수 자리’를 얻기 위해 안절부절못하는 샌님 스타일의 남편과 한평생 이 저택에 묶여 살아야하는 신세이다. 그 집에 차례로 등장하는 사람들이 전하는 말로 헤다는 점점 더 흔들린다. 동창이었던 테아가 찾아온다. 테아는 시의원인 남편을 기꺼이 저버리고 자포자기 상태인 ‘에일레트’의 재기를 돕는단다. ‘에일레트’가 누구인가. 그 옛날 헤다의 연인, 총으로 위협하며 헤어졌던 남자. 술과 약에 무너진 남자였다. 하지만 테아의 순수하고 헌신적인 모습을 보자 헤다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옛 욕망인지, 옛 사랑인지, 아니면 그냥 질투인지. 그리고 테스만 친구인 브라크 판사가 그 질투의 심지에 불을 붙이려 한다. 무언가 욕망과 야망을 갖고서. 그리고 마침내 등장하는 에일레트. 에일레트는 책을 쓰고 있단다. 남편보다 훨씬 더 나은 문장, 훨씬 훌륭한 글이다. 헤다는 테아를 질투하고, 에일레트를 원망하고, 남편을 경멸하기 시작한다. 헤다는 테아와 에일레트에게 아이와 다름없는 원고를 불태우고, 서랍 속에 감춰둔 총을 꺼낸다. 헤다는 자신이 꿈꾸는, 생각하는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관계를 완성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헨리크 입센의 <헤다 가블러>는 1891년에 독일에서 처음 공연된다. 초연 이후 호평보다는 악평이 쏟아졌다고 한다. 입센의 초기사회극에 대한 평가처럼 부도덕하다는 것이다. 혹은 너무 난해하다고. 연구가들은 이 작품이 ‘입센의 희곡 중 가장 차갑고 비인격적인’ 작품이라고 평한다. 13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이제는 좀 더 드라마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헤다’를 중심으로 한 욕망과 야심과 절망의 인간심리를 말이다.
연극 '헤다 가블러'
헨리크 입센의 희곡은 리처드 이어의 각색본으로 훨씬 현대적으로 바뀐다. 아마도 1890년대 노르웨이 사회가 직면한 여성-가족문제보다는 지금의 치정극에 가깝다. 그렇다고 막장으로 치닫는 남녀의 이야기는 아니다. 청춘의 화려한 시기를 끝내고 허니문의 달콤함에 행복할 여주인공의 머리에 불꽃이 튀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관객의 느낌으로 대체할 수 있다. 남편에 대한 불평, 신혼(미래)에 대한 불안, 다른 남자의 대시, 그리고 예전에 차버린 남자에 대한 미련. 물론, 우습게 본 여자가 자신보다 더 나은 현재와 미래를 그리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분노까지.
이번 작품은 현대극답게 여러 상징이 사용된다. 막이 오르고 줄리아나 고모와의 대화를 통해 신혼의 단꿈에 빠져야할 헤다의 뾰쪽한 마음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실제로 임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살이 찐 것 같다’는 말에 차갑게 반응하고, 소파 위에 둔 모자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무대 디자인은 ‘헤다’를 가두는 감옥으로 보인다. 신혼의 가정집, 거실이 아니라 거대한 벽과 무채색의 사각 공간이다. (객석 쪽을 제외한) 삼면 벽에는 의자와 가구, 소도구가 놓여있다. 방금 자신의 역할을 마친 배우, 그리고 다음 장면을 위해 숨을 고르는 배우가 그 의자에 계속 앉아서 헤다의 질투와 분노, 선택을 지켜본다. 헤다의 주변 인물들은 결코 헤다를 떠나지 않는, 사라지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죽은 자조차도.
연극 '헤다 가블러'
무대의 한쪽 벽에는 카라바조의 그림 ‘바쿠스’가 걸려있다. 화환을 쓴 소년(디오니소스)은 게슴츠레 눈을 뜬 채 한 손에는 와인잔을 들고 있다. 화환은 포도송이가 매달려 있다. 앞에 놓인 과일바구니에는 상한 사과가 있다. 헤다의 대사 중에는 “10시 되면 돌아오겠지, 디오니소스처럼 머리에 포도 잎을 두르고, 담대하게 빛을 내는 모습으로. 너도 보게 될 거야 그가 다시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는 걸. 평생 자유로운 인간이 될 거라고.” 아마도 헤다는 학자로서의 남편의 성공과 공동운명이 된 자신의 행복을 확신하지 못하고 ‘에일레트’에 경도된다. 가지지 못하면 파괴해 버리는 방식으로. 끝까지 아름답기를 바랐지만 그 희망마저 무너진 헤다의 선택은 정해졌는지 모른다.
이번 LG아트센터 <헤다 가블러>에서 가장 인상적인 연출방식은 ‘영상 효과’일 것 같다. 가정부 베르트는 무대를 오가면 카메라로 헤다를 잡는다. 그 화면은 정면에 커다랗게 투사된다. 클로즈업된 헤다는 분노하고, 질투하고, 좌절한다.
영화와 드라마의 한류대스타 이영애는 대극장 무대에서 새로운 ‘헤다 가블러’로 열연을 펼친다. 남편 테스만을 경멸하는 속내를 감추고, 드러내고, 숨기듯이 테아와 에일레트에게도 자신의 영향력을 펼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애처로울 만큼. 그런 헤다에게는 장군이었던 아버지의 딸이라는 아우라도, 든든한 남편의 조신한 아내도, 임신했는지도 모를 아이의 성숙한 엄마도 아니다. ‘노라’처럼 ‘헤다’도 그렇게 자기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연극 '헤다 가블러'
▶헤다 가블러 (원제: hedda Gabler) ▶원작: 헨리크 입센 ▶각색:리처드 이어 ▶제작총괄:이현정 ▶연출:전인철 ▶자문:김미혜 ▶대본번역: 정명주▶대본윤색:장영 ▶드라마터그:전강희▶출연:이영애(헤다) 김정호(테스만) 지현준(브라크) 이승주(에일레트) 백지원(테아) 이정미(줄리아나) 조어진(베르트) ▶공연:2025년5월7일~6월8일/ LG아트센터서울, LG시그니처홀
[사진=LG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