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
세기의 라이벌이라 불릴 만한 승부가 있다. 정치판엔 YS와 DJ, 마운드에는 최동원과 선동열, 링 위에선 김일과 이노키, 음악사에선 모차르트와 살리에리가 있었다. 이들은 시대와 조건이 무르익은 곳에서 서로를 향해 치열한 결투를 벌였고, 그 장면은 역사가 되어 대중의 기억 속에 영원히 각인된다. 그들이 견뎌냈을 시간들과 고독, 그리고 잠 못 이루던 밤들은 그 자체로 위대함의 증거다. 그 대결의 무대가 바둑이라면, 인간의 사고가 낼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지략 대결과 전략의 예술이 펼쳐질 것이다. 영화 <승부>는 조훈현과 이창호, 이 위대한 승부사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훈현은 싱가포르 호텔에서 열린 제1회 응창기배 바둑대회 결승대국에서 중국의 섭이평을 꺾고 커다란 우승배를 들어올린다. 이미 조훈현을 한국에서 적수가 없는 최고의 기사. 그의 눈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전주의 바둑신동 이창호이다. 조훈현은 본능적으로 이창호의 바둑 수와 성장가능성을 알아본다. 소년은 서울로 올라와 스승의 식탁에서 밥을 먹고, 그의 손끝에서 바둑을 배운다. 어느새 제자는 청년이 되어, 이제는 스승을 위협하는 존재가 된다.
승부
영화는 <승부>는 바둑팬이 아니어도 직관적으로 게임에 빠져들 수 있다. 영화는 일취월장하는 어린 제작의 영광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스승의 입장에서 바둑판을 본다. 어린 제자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너무나 빨리, 훨씬 훌륭하게 자랐을 때의 낭패감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그것도 스승의 방식이나 가르침을 오롯이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으로, 또 다른 스타일로 승승장구할 때의 복잡한 심사를 숨길 수가 없다.
영화 <보안관>을 만들었던 김형주 감독은 바둑판의 쿠데타를 정공법으로 담는다. 이병헌의 명불허전의 연기는 감탄할 만하고, 이창호를 연기한 김강훈과 유아인의 연기는 잘 닦은 바둑돌만큼 반짝반짝 윤이 난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을 수 없다는 그런 세상에서 제자는 이겨도 기쁘지 않을 것이고, 스승은 져도 마뜩찮다.
인간이 펼치는 수많은 영역의 수만 가지 대결에서 바둑은 가장 정적이며, 전략적이다. 각진 바둑판, 촘촘한 선 위에 흑과 백의 돌이 하나씩 자기의 집을 짓고, 자기의 왕국을 세우며 최고의 전략과 지략을 펼친다. 포석과 기세는 장대한 전선을 이루고, 매번 치열한 전투를 펼친다. 물론, 바둑을 모르는 사람은 누군가가 질 것 같다는, 누군가가 크게 성공했다는, 어쩌면 저것이 말로만 듣는 ‘신의 한 수’라고 짐작하며 ‘승부’에 박수를 보낼지 모른다. 그게 바둑영화의 매력이면서도 또 한계이다. 우리는 스승과 제자의 승부가 어떻게 날지 알고, 그 승부가 마지막이 아니란 것도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
스승과 제자는 그렇게 오랫동안 바둑알을 들고, 장고를 하며, 바둑판에 집을 짓고 있는 것이다.
▶승부 ▶감독:김형주 ▶각본:김형주,윤종빈 ▶출연: 이병헌, 유아인,김강훈, 고창석,현봉식,문정희,조우진,정석용 ▶제작사:영화사월광, BH엔터테인먼트 ▶배급사:바이포엠스튜디오 ▶개봉:2025년3월26일/115분/12세이상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