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완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인 <내가 죽던 날>은 김혜수와 이정은, 그리고 노정의라는 세 여배우의 출중한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들이 한 사람씩 등장할 때마다 삶과 죽음의 대의명분을 생각하게 된다.
김현수(김혜수) 경위는 개인사로 심사가 복잡하다. 남편과의 이혼소송 문제로 가뜩이나 불안한 가운데 교통사고까지 낸다. 어디 마음잡을 곳이라도 있었으면. 징계위기에 처한 그에게 상사가 간단한 일을 하나 맡긴다. 섬에서 자살한 여고생 세진(노정의)의 사건을 마무리 지으라는 것. 강력사건의 유일한 증인인 세진은 증인보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외딴 섬에서 생활해 왔는데 태풍 치던 날, 유서 한 장만 남겨두고 절벽 아래로 사라졌다. CCTV와 현장 탐문조사 결과 모든 것이 ‘자살’이 명백하다. 그런데, 김현수는 계속하여 이 사건에 집착하고, 죽은 여고생의 흔적을 찾는다. 그러다가 섬마을의 또 다른 상처받은 여인 순천댁(이정은)을 만나게 된다. 섬마을 CCTV와 서울 경찰서, 그리고 자신의 텅 빈 오피스텔 원룸에서 김현수는 또 다른 자신을 만나기 위해 방황한다.
영화 <내가 죽던 날>은 진실추적극이라는 거창한 수사물인 듯 보이지만 실상은 자신의 영혼구제기이다. 김현수 경위에게 주어진 임무는 간단하다. 누가 보아도 ‘자살’로 처리될 실종 사건을 행정적으로 ‘처리’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왜 그리 사건에 집착할까. 절벽에 부딪치고, 파도에 침식당한 시신을 직접 봐야 소녀의 부재를 확인할 수 있고,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다고 믿는 것일까. 영화는 세진 가족의 불완전함을 이야기하며 김현수 경위와의 집합점을 찾으려 노력한다. 아니, 적어도 관객들은 그렇게 본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디서 어긋났는지가 수사의 시작이다. 하지만, 그 길을 따라가면서 만나는 사람과 듣게 되는 이야기에서 사람은 사라지고, 사건만 남는다. ‘사람’ 김현수는 사건을 따라가다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박지완 감독은 단순한 자살극을 따라가며 동병상련의 이야기를 펼친다. 따지고 보면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인연이 없는, 일면식도 없는 타인이다. 각자 크기는 다르겠지만 삶의 불안을 야기하는 고통을 안고 있다. 그런 마음을 헤아리고,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것, 그것이 그들에겐 힐링이자 삶의 출구일 것이다. 김혜수, 이정은, 노정의의 연기도 출중할 뿐더러 함께 나온 김선영. 문정희. 이상엽. 조한철. 김태훈, 김정영의 연기도 뛰어나다.
박지완 감독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 <여고생이다>로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아시아 단편 최우수상을 받았단다. 그 후 12년 만에 내놓은 장편영화 데뷔작이 바로 <내가 죽던 날>이다. 어찌 보면 이 영화는 이주영 감독의 <싱글라이더>와 연이 닿는 듯하다. 2020년 11월 12일 개봉/12세관람가 (KBS미디어 박재환)
[사진 = 영화 '내가 죽던 날' 스틸/ 영화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