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아이가 ‘증발’했다. 당시 2000년 4월 4일, 서울시 망우 1동 염광아파트 놀이터 부근에서 사라진 여섯 살 여자 아이 최준원은 친구인 승일이 네에 들렸다 오겠다고 하다가 사라진 후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영화 ‘증발’(감독 김성민)은 20년 전 사라진 장기 실종 아동 최준원 어린이의 가정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실종 사건 자체보다는 그로 인해 한 가정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며 마치 ‘증발’하듯 사라진 가족 구성원 간의 관계, 그 속의 서사를 섬세한 시선으로 들여다보았다.

연출을 맡은 김성민 감독은 오랜 기간 동안 다큐멘터리에 대한 꿈을 품고 있었다. 그는 현실에 부딪혀 직장 생활을 할 때도 있었으나 이후 퇴사를 하고 다큐멘터리 조연출 계약을 맺었다. 조연출 계약 기간이 끝나가고 한창 절박했을 지점에 그는 한 에피소드를 맞닥뜨렸다.
“가까운 지인이 실종이 된 적이 있었다. 경찰 수사가 진행이 안되는 실종 사건이라 내가 직접 지인을 찾으려고 열흘 정도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고 다녔다. 어머니 옆에 의지가 되려고 했는데 어떤 방법으로도 위로해드릴 수가 없더라. 그때 느꼈던 막막함이나 옆에서 지켜봤던 절박함이 마음에 자리 잡았다. 그 지인은 성인이 된 후에 실종이 됐는데도 어머니가 힘들어했는데 어린 아이가 실종된 부모들은 그 시간을 어떻게 견디고 있는 걸까 궁금증이 들었다. 실종아동 전문기관을 만나기 시작하며 제작하게 된 작품이다”라며 작품의 소재를 정하게 된 계기를 언급했다.
영화 제목인 ‘증발’은 중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 아이가 ‘증발’하듯 사라졌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지만 이 작품은 남은 가족 구성원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도 하다. 그는 “아버지가 나한테 촬영하는 동안 반복적으로 했던 말이 ‘내 시간은 2000년 4월 4일에 멈춰있고 갇혀있다. 여기가 내 섬이다’라는 말이었다. 실종 아동 사건은 한 가정을, 한 사람의 삶을 서서히 무너뜨리는 심각한 사회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서서히 와해가 되고 사라져버려서 가까이서 계속 지켜보지 않으면 그 균열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일지 고민하다가 가족과의 관계 자체의 ‘증발’이라는 의미도 넣고 싶었다”라며 제목에 대한 비하인드를 밝혔다.

그는 작품을 준비하기 위해 10명이 넘는 실종 아동 가족들을 찾았다. 그러다 그는 최준원의 아버지인 최용진을 만났다. 그는 그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기억을 회상했다.
“다른 실종 가족의 부모님들과는 달랐다. 처음 봤을 때도 슬픔이나 절망이나 어떤 다른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답변이 마치 자동응답기 같았다. 아무런 감정 없이 훈련되어서 누르면 나오는 말인 것처럼 당시 실종 상황과 정보들을 말했다. 굉장히 이상한 느낌이었다. 개인적으로 궁금해졌다. 어떻게 이 세월을 견뎌 왔길래 이 정도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것인지, 그래서 더욱 아버지의 감정을 알고 싶었고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는 6년 동안의 제작 과정이 지난 후 7년이 된 해에 ‘증발’ 개봉을 성사시켰다. 그는 “아버지에게 동의를 구할 때도 최소 2년 이상일 것이라고 말하고 시작했다. 다큐멘터리에 있어 대부분의 출연진들이 불안해한다. 카메라로 누구를 담는다는 자체가 폭력적인 행위고 조심스럽게 담아야 한다는 직업윤리를 가지고 있지만 개인적인 신뢰를 쌓는 건 별개의 문제다. 카메라 뒤에 있는 사람으로서 촬영하는 방식 자체도 조심스럽게 하고, 거리를 좁혀나갔다. 그러다가 오래 촬영한 이후에 나에 대한 믿음이 쌓였고 편해졌다”며 촬영하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장기 실종 아동이라는 소재는 무거운 소재다. 가끔 감독이나 출연진은 자신의 작품을 찍으며 동화되는 경우가 있다. 이는 김성민 감독이나 작품 속 최준원의 가족 구성원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가족들이 영향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대로 진행하면 가족에게 과정 자체가 상처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심리 자문을 수소문해서 받았다. 그러다 어느 날 심리 자문해주는 전문가들이 감독도 검사를 받아보면 어떠냐고 물었는데 그때서야 내게도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음의 병의 무서운 점을 깨달았다. ‘견뎌야지’ 하다 보면 어떤 상태로 내가 지금 빠져들고 있는지를 모르겠더라. 심리 치료를 1년 넘게 받았었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밝혔다.

6년이라는 긴 제작 시간을 통해 그는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만감이 교차하지만 이 영화를 하면서 인생을 배운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 전까지는 순진하게도 이 세상의 사람들이 선과 악으로 구분이 된다고 믿었다. 이 영화를 통해서 인생을 경험해보니 선과 악이 아닌 이 세상에는 선택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과 책임지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에 대해서 좀 더 이해심이 넓어졌다”며 자신의 성장에 대해 돌아봤다.
이어 그는 “내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큰 이유는 내 카메라 앞에 시간을 허락해준 사람들의 시간을 무의미하게 만들면 안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생각이 없었다면 진작에 포기했을 것이다. 처음 촬영 제안을 드리며 약속 했던 말은 ‘꼭 잘 완성하겠습니다’였다.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어서 안도감이 든다”며 개봉에 대한 감회를 밝혔다.
‘증발’은 7년 만의 극장 개봉과 동시에 관객들에게도 선물 같은 영화지만, 실종 아동인 최준원을 그리워하는 가족들에게 바치는 헌사 같은 작품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는 가족 구성원이 서로에게 알지 못했던 진심을 이야기하는 인터뷰 장면들이 등장한다. 최준선은 실종 당시의 이야기를 꺼내기도, 그 지점 이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붕괴된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어렵사리 꺼내놓기도 한다.
김성민 감독은 이에 대해 “나는 준선에게 몰입해서 촬영을 진행했다. 촬영을 시작할 때 나는 아빠가 아니었고 부모로서 가지고 있는 느낌이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이 있어서 준선이와 함께 섭섭한 느낌이 들었다. 준선이가 아무에게도 꺼내지 않은 이야기를 꺼낼 때는 무거운 책임감이 들었다. 그런데 그 속마음은 결국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었다. 자기를 한 번 더 봐주길 바라는 바람이지 미움이 아니었다. 이 작품을 통해 아버지와 어머니가 준선이의 진심을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며 준선이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표했다.
이어 “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가족들이 고맙다고 했던 순간이었다. 준원이 어머니에게 촬영 허가를 가장 마지막에 받았다. 그때 출연 동의서를 받으러 간 적이 있는데 편집본을 보시다가 준선이의 인터뷰를 보고 매우 놀랐다. 준선이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 꿈에도 상상을 못했고 지금도 마냥 철없는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무심했다고 말했다.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때 어머니가 보러왔다. 몇 년 만에 가족 네 명이 다 모여서 나들이를 했는데 그 순간에 제일 행복하고 영화 만들면서 기뻤었다”며 당시의 감정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그는 ‘증발’을 통해 성장한 자신을 되돌아봤다. 6년이라는 시간을 거치며 싱글에서 자녀를 둔 아버지로 성장했다. 촬영 중간에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영화제에 참여하기 시작했을 시점에 아이가 태어난 그는 '증발'을 다양한 각도로 보기 시작했다.
“선배들이 만약 결혼해서 아이를 가지고 있는 상태였으면 절대로 이 이야기를 다루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준선이에게 감정 이입을 했다. 편집을 할 때도 비슷한 생각이 있었는데 아내가 아이를 임신하면서 아빠가 된다는 생각하니까 느낌이 다르긴 했다. 영화가 완성되고 나서 아빠가 되었을 때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입장, 어떤 세계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이해가 간다는 사실을 느꼈다.”
이어 그는 ‘증발’을 되돌아보며 미래의 자신, 그리고 다음 작품에 대한 희망적인 메시지를 남겼다.
“가족들의 시간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장편 데뷔작이었다. 관객들이 몰입할 수 있는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덕분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 힘을 빌려서 영화가 이렇게 완성됐다. 나는 아직 한참 부족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스스로에게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싶은 점이 있다면 ‘잘 견뎠고 잘 참았다’는 말이다. 그것은 내 자신에게 스스로 이야기해주고 싶고 위로해주고 싶다. 다음 작업도 '잘 견뎌보자'는 생각이다.”
한편, 영화 '증발'은 오늘(12일) 개봉해 극장가에서 상영 중이다. (KBS미디어 정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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