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위대한 영화의 리뷰를 하기 전에 무례한 이야기부터 하자면, 현재 우리 지구인의 머리 위에는 수많은 우주쓰레기가 떠돌고 있다는 사실이다. 옛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궤도에 진입하기 전부터 미국과 소련은 수많은 인공위성을 하늘로 쏘아 올렸다. 요즘 와서는 하다못해 북한조차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시대가 되었다. 한 조사에 따르면 그렇게 쏘아올린 위성들이 임무가 다 되거나 배터리가 떨어져서, 혹은 고장이 나서 우주미아 쓰레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이들이 충돌/추돌한다면? 실제 우주에선 요격실험도 이뤄지고 충돌도 일어난다. 큰 조각 작은 조각이 두서없이 떠돌아다니고, 낡은 우주선 표면의 페인트조각이 떨어져나간다. 볼트 너트 같은 작은 조각까지 합치면 수백만 개의 잠재적 위험물체가 우주공간을 떠다니고 있단다. 그것도 엄청난 속도로. 한없이 넓을 것 같은 저 지구 위 하늘에서는 아슬아슬한 회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주인이 놓쳐버린 스패너 공구도 그 궤도에 가까스론 진입한 다른 위성에게는 흉기가 될 수 있는 셈이다. 물론 오래 전부터 우주쓰레기를 다루는 국제법이 논의되고 있긴 하다. 아마 쓰레기봉투를 지참하지 못하면 우주개발 후진국은 우주에 발도 못 붙이는 시대가 올지 모른다. ‘그래비티’는 바로 그런 우주공간에서 펼쳐지는 환상적인 인간드라마이다.
여자 우주인, 우주공간에 고립되다
지구(지상)로부터 600킬로미터 상공. 우주공간. 공기가 극도로 희박하니 소리를 전할 매질이 없어 적막하기 그지없다. 그곳에 미국의 우주선이 멈춘 듯 유유히 떠다니며 우주인들이 허블망원경을 수리하고 있다. 베테랑 우주인 맷(조지 클루니)과 과학자 스톤(산드라 블록)박사. 커다란 스크린은 온통 암흑이고, 저 멀리 마치 밝은 달처럼 비치는 지구의 아름다운 모습이 관객의 숨마저 멈추게 한다. 헬멧의 무선장치를 통해 매트의 시답잖은 농담을 들으며 스톤 박사는 수리에 열중한다. 그녀에게는 첫 우주여행이며 첫 우주유영이다. 엄마의 자궁 속에서나 느꼈을 최고의 고요함과 평안이 깨지는 것은 영화 시작 후 10여 분이 지난 뒤이다. NASA의 무선에 따르면 러시아가 고장 난 인공위성을 폭파시켰고 그 위성의 잔해가 지금 수리작업 중인 미국 우주선 쪽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것이다. 눈 깜짝 사이에 미국 우주선은 산탄총을 맞은 새 모양 엉망진창이 된다. 당연히 휴스톤과의 통신도 끊겨버린다. 이제 맷과 스톤에게 우주의 장엄함과 지구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여유는 사라진다. 우주복에 남아있는 산소가 바닥나기 전에 가장 가까이에 떠돌고 있는 다른 우주선으로 헤엄쳐 가야하는 것이다. 오직 암흑과 고독, 그리고 산소부족, 그리고 어디선가 갑자기 쏟아지는 우주 파편들을 가까스로 피해가면서 말이다. 정말 우주 속 먼지에 불과한 인간은 살아서 우주선에 안착할 수 있을까? 그 모선이 작동은 할까. 푸른 별 지구를 두 번 다시 볼 수 있을까. 아름다운 지구의 보드라운 대지에 발을 디딜 수는 있을까. 영화는 장엄함으로 시작하여 경건함으로 끝난다.
우주의 끝에서, 고향을 꿈꾸다
이 영화에서 조지 클루니가 연기하는 우주비행사 맷 지휘관은 초반의 즐거운 수다꾼에서 위기 상황이 닥치자 일순간의 주저함도 없는 탁월한 상황 판단력을 보여준다. ‘고립’된 우주공간에서 부족한 산소를 짊어지고 극단적 선택을 하여야할 경우 리더가 발휘해야할 미덕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자기희생이며 우주에 기록될 인류애이다. 아마도 조지 클루니 선장은 우주인이 되기 위해서 오랜 훈련과정을 거쳤을 것이고 많은 우주비행경력을 통해 우주에서의 인류애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우리가 사진으로 보는 ‘푸른 빛 지구’에 대한 관념이 지저스 크라이스트 급이었을 것이다. 처음 우주에 가보는 산드라 블록은 지구에 많은 고민과 걱정을 남겨둔 인물이다. 짧은 우주출장에서 만나게 된 뜻밖의 사고를 통해 산드라 블록은 지구에 남은 사람과 범우주적 범사에 대한 고마움을 피 속 헤모글로빈 하나하나에 새겨 넣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살아서 돌아가자’를 강조하는 재난영화가 아니라 ‘살아서 되돌아보는’ 지구인의 깊숙한 자의식의 영화인 셈이다.
멕시코 영화감독이 그린 지구인의 회귀본능
지금껏 우주를 다룬 드라마는 화려한 비주얼에 기댄 인류의 휘황찬란한 과학적 성과들에 초점을 맞춰왔다. 외계인의 지구습격이든 지구인의 안드로메다 탐험이든 간에 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성과보다는 한없이 나약한 지구인의 우주표류를 담고 있다. 제 아무리 위대한 인간, 똑똑한 인류라도 산소 없이는, 우주복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남을 수 없는 미약한 존재로. 알고 보니 이 영화의 감독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멕시코 국립대학에서 영화와 철학을 전공한 자이다. ‘위대한 유산’과 ‘이 투 마마’까지만 해도 아날로그적 인간미를 느낄 수 있는 영화미학을 보여주었는데 ‘판의 미로’와 ‘해리 포터 아즈카반의 죄수’를 거치며 할리우드의 주류에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충분히 내뿜는 존재가 되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쿠아론 감독이나 대만 출신의 이안 감독처럼 그들은 국경과 언어를 뛰어넘는 인류 보편적 드라마, 인간의 근원적 존재론에 탁월한 솜씨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영화의 진짜 미덕은 짧은 러닝 타임인지도 모른다. 화려한 볼거리와 충격적 영상을 담은 대작일수록 상영시간이 한없이 늘어지는 요즘 추세에 90분 내에 영화의 최종안착을 만나본다는 것은 마치 암흑의 우주에서 90분짜리 산소통에 의지한 채 한줄기 불빛이 보이는 방향으로 결사적으로 허우적댄 느낌이다. 마지막에 깨끗한 산소, 충분한 압력, 밝은 빛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될 때. 지구에서의 삶은 참 아름답다는 것을, 평정심을 느끼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영화이다. (박재환 2013.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