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탈리스트
해마다 3월이면 미국에서는 아카데미 영화시상식이 열린다. 아무리 고급스러운, 학구적인 영화제가 많아도 오스카 트로피를 향한 업계와 스타, 팬들의 관심은 ‘넘사벽’이다. 올해도 많은 작품들이 이 레이스에 뛰어들었다. 지난 연말부터 유력주자로 손꼽혔던 작품이 바로 <브루탈리스트>이다. ‘고난 받는 천재’, ‘시대를 잘못 타고난 주인공’, ‘처음엔 인정받지 못하지만 마침내 진가를 발휘하는 예술혼’, 그리고 무엇보다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난 인간승리’라니. 참으로 아카데미 회원들이 보기엔 매력적인, 매혹적인 이야기이다.
헝가리의 유태인 라슬로 토트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아 미국까지 오게 된다. 뉴욕항의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보며 감격하지만 그의 아내와 고아가 된 조카는 유럽에 남아있다. 바우하우스에서 교육받은 라슬로는 헝가리에서는 한때 각광받은 건축가이지만 미국에서의 삶은 보잘 것 없다. 처음 사촌의 가구 가게에서 얹혀살며 테이블과 의자를 만든다. 그러다가 의뢰받은 리모델링 작업이 무산되면서 다시 한 번 추락한다. 임시 노동자수용소에서 막노동을 하며 입에 풀칠하는 신세이다. 그러다가 필라델피아의 부유한 사업가 밴 뷰런의 눈에 띄어 ‘기념비적 건축물’의 시공을 의뢰 받는다. 하지만 헝가리의 유태인 건축가 라슬로는 미국의 자본주의 건물주와 미래지향적이며 창조적인 관계를 계속 이어갈지는 의문이다. 머릿속 설계안이 대지 위의 건물로 차곡차곡 올라설 동안 라슬로는 마약과 알코올 중독, 그리고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허우적댄다. 물론 그 원인은 ‘밴 뷰런’의 호의와 미국인의 호기심에 의해 아슬아슬 유지되는 빈약한 토대 위의 모래탑에 올린 대리석 탑처럼 상실과 좌절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브루탈리스트
영화는 [서장-1부(도착의 수수께끼)-2부(아름다움의 핵심)-에필로그]로 구성되어 215분 동안 펼쳐진다. 중간에 15분의 인터미션이 영화 관람의 새로운 경험이 된다. 상영시간의 위압감만큼 주인공의 험난한 삶이 관객을 주눅 들게 만든다. 홀로코스트 이야기는 펼쳐지지 않지만 전장의 유럽에서, 독일 몰락 뒤 소련의 진주 이후 펼쳐지는 가족의 이별은 영화 초반부에 충분히 보여준다. 브라스밴드의 연주가 어지럽게 울려 퍼지면서 (마치 타이타닉의 3등선 승객들처럼) 뉴욕항에 도착한 뒤 ‘미국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어두침침한 계단을 뛰어오르고, 기울어진 듯 뒤집어진 듯한 자유의 여신상을 바라보며 이들 정치적 난민, 박해받은 예술가들이 맞게 될 미국에서의 새로운 운명이 기대된다.
소속된 국가나 민족의 비극이 개인의 머리 위에 떨어졌을 때 개인이 겪게 될 고통과 슬픔은 너무나 현실적이다. 라슬로 토스는 술과 마약(약물)에 의존하고, 때로는 지극히 개인적인 방황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스폰서나 지지자를 만나게 되고, 가족과 재회하게 되면서 과연 완벽한 새로운 삶을 설계할 수 있을까.
이 영화는 공동의 기억(비극)을 가진 이주자들이 겪는 상실과 추락의 무게감을 전하려고 노력한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관객들은 그들의 ‘큰 고난’과 ‘작은 고통’을 단지 ‘예술가적 고뇌’ 정도로 받아들이기 쉽다. 어쩌면 그들은 한 때 대단한 삶은 아닐지라도 평화로웠던 일상에 만족하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 일상의 안정감이 한순간에 무너진 뒤, 고난의 길을 걷는다면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과거의 유령에 발목 잡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 영화는 유태인의 트라우마도, 좌절된 아메리칸 드림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브루탈리즘’이라는 건축물의 미적 성취물에 대한 감상은 더더군다나 아니다. 오히려 제목에서 말하는 ‘브루탈리스트’는 인성의 잔혹한 면을 이야기할지 모른다. 그게 히틀러가 되었든, 가이 피어스가 되었든. 홀로코스트의 비극도, 카라라의 대리석도, 필라델피아의 콘크리트 건축물도 라슬로 토스의 개인적 아픔을 넘어설 수는 없는 것이다.
▶브루탈리스트 (원제:▶The Brutalist) ▶감독:브래디 코벳 ▶출연:애드리언 브로디(라즐로 토스) 펠리시티 존스(에르제벳), 가이 피어스(해리슨 리 밴뷰런) ▶수입/배급:유니버셜 픽쳐스 ▶개봉:2025년 2월 12일/215분/청소년 관람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