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그리고 삶. 우리는 그 경계에서 상실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터득해가며 살아간다. 하지만 가까운 미래에 상실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는, 인간의 영원과 불멸을 가능하게 만드는 인공지능 시스템이 발명된다면 어떨까. 그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을 김의석 감독은 영화 ‘인간증명’을 통해 던졌다.
‘인간증명’(감독 김의석)은 어머니 혜라(문소리 분)가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있는 미래에 아들인 영인(장유상 분)을 인공지능 기술을 통해 살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작품 속에서 혜라는 아들이 아닌 것처럼 행동하는 인공지능의 특이점을 발견하게 되고 인공지능이 자신의 아들의 의식을 죽였다는 혐의를 씌우기 시작한다.
그는 전작 ‘오명’, ‘죄 많은 소녀’ 등 다양한 소재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다채로운 시선으로 풀어낸 감독이다. 그는 ‘인간증명’을 통해 SF 장르에 도전했다. “원작 소설이 있었고 각색해서 만들었다. 작가 이루카의 ‘독립의 오단계’라는 소설이 있었다. 소재적으로 새롭다는 느낌보다는 그동안 해왔던 이야기를 조금 더 다른 스타일로 풀어낼 수 있겠다는 기대를 안고 작품을 택해 시작했다”며 작품을 만든 계기를 밝혔다.
최근 인공지능을 다룬 작품들이 많아지는 추세지만 그중에서도 김의석 감독의 작품은 기술적인 면보다도 인간적인 서사에 집중했다. 그는 “‘블랙 미러’는 아주 재밌게 봤다. 이 기획이 있고 설명하기에 좀 편하기 위해 편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그 시리즈에 대해 많이 언급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에 비해 느리고 CG도 많지 않다.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보고 싶었다. 미래적인 디자인과 어떤 공간들이나 관념들을 벗어나서 작업을 해보고 싶었다. 그런 시대적인, 공간적인 배경을 가늠하기 어렵게 만들어서 배우들의 연극적인 무대와 얼굴에 집중하게 할 수 있게끔 연출했다”며 연출 포인트를 강조했다.
김의석 감독은 영화계의 소문난 연기파 배우 문소리를 캐스팅했다. 그는 캐스팅 계기에 대해 “평소 팬이었고 이런 방식의 이야기가 선배님의 목소리와 얼굴로 이 작품이 표현이 되면 독특할 것 같았다. 실제로 자녀가 있기도 하고 국내에서는 전설적인 배우다. 그곳에서 나오는 개인적인 딜레마와 본능적인 모성이 담기면 독특한 작품이 나올 것이라 기대했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작품 속에는 또 다른 주연이 존재한다. 아들인 영인 역을 맡은 배우 장유상은 다작을 통해 연기 경력을 쌓아온 연기파 배우로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KBS 독립영화상’을 수상한 영화 ‘라임 크라임’(감독 이승환, 유재욱)의 주연이기도 하다.
그를 캐스팅하게 된 계기에 대해 김의석 감독은 “'인간증명'은 의문의 차량 사고로 죽음을 맞이하며 시작하는 영화다. 운전을 할 줄 알아야 해서 어린 나이는 아니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 오디션을 시작했다. 그 와중에 장유상 배우는 자기 나름의 철학과 접근 방식들이 완성되어있는 배우였다. 그러기에 이 배우가 이 역을 맡으면 이미지적인 장점과 연기적인 완성도가 높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그를 캐스팅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이 작품은 한 가지 의문을 집요하게 물어뜯는다. ‘과연 우리는 인공지능을 인격체로 볼 수 있는가’. 다양한 인공지능 기술이 나오고 있는 이 시대에 어쩌면 이것은 일상에서 던져야 할, 가까운 미래에 뉴스에서 흘러나올 만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작품은 초반부터 인공지능이 온전한 인격체임을 암시하고 있다. 자신이 오롯한 인격체임을 인정받기 위해 무리해서 유죄를 주장하고, 자신의 의지로 영인의 의식을 지웠다고 주장하는 인공지능의 행동은 인간이라는 울타리에 소속되기 위한 발악처럼 보이기도 하다. 영인이 외치는 “없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살았다”라는 명대사가 그러하다.
김의석 감독의 말에 따르면 작품 속에 의도적으로 인공지능의 미래에 대해 엘론 머스크가 실제로 이야기했던 내용을 심었다고 한다. 로봇을 만드는 회사의 CEO가 변호사에게 말하는 대사다. “모든 욕망을 충족할 때까지 기술은 계속 발전할 것이고, 당연히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겠죠. 사람들은 더 원하고 또 더 두려워하게 될 거에요.”
그는 이 대사에 대해 “인류에 대해서 미래에 대한 회의적인 의견을 거기서 따왔다. 또 비슷한 게 초반부에 인공지능에게 테스트를 하는 장면에서 던지는 질문이 있다. '불을 보면 매혹되는가'라는 질문은 인적성 검사에 나오는 질문 중 하나였다. 문학적인 느낌도 들어서 가져왔다. 이것이 '단체생활이 가능한가'를 판단하기 위해서 하는 질문이라고 들었다”고 언급했다.
이어 김의석 감독은 '인공지능이 인격체로 존중받아야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아직 결론 내리진 않았다. 하지만 만약 그런 미래가 온다면 인격체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말할 것 같다. 몸이 있다고 해서 완벽하게 그 사람이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또한 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런 영화를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며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인간증명’은 살아남은 자보다는 남은 자들의 이야기다. ‘남은 자들이 상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만약 근미래에 사람을 되살리는 기술이 발전했을 때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일까’라는, 작품 속의 주인공과 동시에 관객들에게도 질문의 여지를 남긴다.
그는 “우리가 ‘부재하는, 상실을 안겨준 사람을 정확하게 기억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모두가 자신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고 산다. 살아남아서 자신이 편한 위주로, 좋은 기억 위주로 편집하고 각색하면서 삶을 유지한다는 생각도 든다. 진실과 실체는 그렇다면 존재했나. 그 여부는 남겨진 사람들의 몫인 것일까.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나 이기심일 수도 있다. 마지막에 혜라가 안드로이드 아들에게 조금은 마음의 문을 열게 되는 장면에서 관객들 또한 자신이 미뤄뒀던 기억들, 인식하고 싶은 대로 기억했던 것들을 되돌아보게 되면 좋겠다”고 언급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번 ‘2020 부산국제영화제’에서 90분으로 추려진 확장판 ‘인간증명’을 상영하게 된 소감과 관객들에게 대한 메시지를 남겼다.
50분과 90분 확장판의 차이에 대해 그는 “50분의 영상에서는 안드로이드, 영혼 살인 등의 설정과 기계가 자신의 인격을 주장하며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는 과정들을 최대한 설명하고 전달하는 것에 집중했다. 90분 확장판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 좀 더 설명하고 싶었다. 존재에 대한 이야기나 갈대 같은 사람들과 상황, 끊임없이 변화하는 결론들을 넣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은 내게 내 나름의 정체성을 한 번 더 확인하게 해주는 이벤트였다고 생각한다. 미디어가 변화해서 극장이 구 미디어 같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전쟁통에 정체성을 끝까지 잃지 않으려 노력했던 것처럼 마스크를 쓰고 관객들을 만났다는 건 재밌는 경험이었다.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이 변화하는 시대에 어쩌면 무리하고 독단적인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자긍심이 생기는 시도에 크게 의미를 뒀다. 찾아온 모든 관객들에게 감사했다”며 자신의 작품을 응원해주는 관객들에 대한 훈훈한 메시지를 남겼다. (KBS미디어 정지은)
[사진= 김의석 감독, '2020 부산국제영화제' 스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