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가리
한국 독립영화계에서 자본의 논리를 비껴가며 가장 독창적인 행보를 보이는 이를 꼽으라면 단연 고봉수 감독이다. 신작 <빚가리> 역시 그의 전매특허인 꿋꿋한 스타일과 화법이 고스란히 담긴 눈물겨운 작품이다. 제목인 '빚가리'는 빚을 갚는다는 뜻의 충청도 사투리로, 영화는 예술영화 전용관조차 없는 조치원을 배경으로 주민들과 함께 완성한 로컬 시네마다.
영화는 조치원에서 '제일슈퍼'를 운영하는 대복(고성완)의 궁상맞은 일상을 비춘다. 대형 마트와 온라인 쇼핑이 점령한 시대에 동네 슈퍼의 경영은 최악이다. 밀린 가게 세와 이혼한 아내의 위자료, 외상만 일삼는 이웃까지 대복의 어깨를 짓누른다. 여기에 자연주의 단체에 빠져 개량한복을 입고 산천을 누비는 아들(문용일)의 행보는 속을 뒤집어놓는다. 소시민 대복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술과 담배, 그리고 허장성세뿐이다.
고봉수 감독은 이번에도 배우들의 자발적이고 순발력 넘치는 연기를 극대화한다. 전문 배우와 일반인 출연진이 뒤섞여 빚어내는 생활 연기는 대사 사이의 정적조차 처절한 현실로 치환한다. 특히 감독의 숙부이자 버스 기사인 고성완의 열연과 제작자이자 딸 역할을 맡은 시혜지의 리얼한 만담은 압권이다. 화려한 OST 대신 흐르는 투박한 선율은 초저예산 독립영화만이 줄 수 있는 소박한 감동을 더한다.
좌절과 분노 속에서도 서로를 껴안으며 이해하려는 소시민들의 모습은 따뜻한 훈풍을 전한다. 그러나 마지막 흑백 영상 속 사다리를 바라보는 장면은 오르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서글픈 좌절을 암시하며 긴 여운을 남긴다. 고달픈 인생의 무게를 이토록 정직하고 유머러스하게 담아내는 고봉수 사단의 다음 행보를 다시 한번 격하게 기다리게 된다. #800자리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