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열린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은 놀랍게도 넷플릭스 무비 <전,란>이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오랜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가 BIFF ‘개막작’이 결코 대중적인 흥행작품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올해는 그 고리를 끊을 요량인지 넷플릭스 작품을 내걸었다. 그래서 논란도 많다. 넷플릭스는 자사 플랫폼을 ‘세계적’ 영화제를 통해 홍보하고 있으니 손해 볼 것이 전혀 없는 구도이다. 영화팬으로서도 나쁠 것은 없는 듯하다. 몇 해 전 티모시 샬라메 주연의 넷플릭스 무비 <더 킹: 헨리5세>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되었다. 엄청난 스토리, 웅장한 사운드, 스펙터클한 영상을 조그만 화면으로만 보기에는 아까워도 너무 아까웠으니 말이다. <전,란>도 그러하다. 이것이 어찌, 6인치 남짓 모바일로 볼 작품인가.
‘전,란’은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동굴 안에서 벌어지는 계급이 다른 두 남자의 운명을 다루는 작품이다. ‘이종려’는 조선 최고 무신 집안의 귀하신 자제분이다. 조상들은 대대로 병조판서를 지냈을 이 집안의 종려는 어렸을 때부터 검술을 배우지만 시원찮다. 영화는 ‘조선의 계급사회’를 초반에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어린 종려가 검을 잘못 다룰 때마다 옆에서 종의 아이가 매를 대신 맞는다.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는 정도가 아니다. 매질에 아이가 비명횡사한다. 그 자리에 ‘천영’이 들어온다. 천영의 신세는 기구하다. 양민이었지만 빚 때문에 노비신세가 되었고, 이렇게 주인 잘못 만나 죽을지도 모를 ‘매잡이 노비’가 되는 것이다.
영화는 종려(박정민)와 천영(강동원)의 기묘한 공생을 보여준다. ‘재주가 미천한’ 종려는 ‘비천한’ 천영 덕분에 무과에 장원급제하는 영광까지 누린다. 왕이 종려에게 어사화와 푸른 옷(靑衣), 보검(神劍)을 하사하는 날 운명이 엇갈린다. 오직 ‘노비문서를 찢어버리는’ 면천(免賤)만을 기대한 천영은 배신감에 몸서리를 치게 되고, 어쩔 수 없는 자신의 ‘계급적 운명’에 분노한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터진다.
조선 역사상 손꼽히는 분노유발 캐릭터인 선조는 차승원이 연기한다. 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안위, 왕좌의 보위에만 급급하다. 서둘러 궁을 떠나고, 저 멀리 경복궁이 불타는 것을 지켜본다. 자신의 백성들이 분노하여 불을 지른 것이다. 경복궁에 불을 지른 자가 누구인지는 논란이 있다. 백성인지, 왜군인지. 하지만 선조의 꼬락서니로 봐서는 <전,란>에서의 분노가 합리적일 듯. 선조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서 또 한 번 ‘백성과 유리된 임금’의 자태를 보여준다. 나룻배에 매달린 백성을 떨쳐내기 위해 호위무사는 칼을 휘두른다. 임금의 뱃전에 떨어지는 손목과 손가락들. 계급사회와 왕조사회의 허상을 단박에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다시, 천영과 종려. 둘의 관계는 기이한 무술 훈련과정을 거쳐 오랜 기간에 형성된 친밀감이 있을 것이다. “우리, 동무인가?”라는 대사를 통해 둘은 양반과 천민이라는 계급을 뛰어넘은 유대감이 있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왜란이라는 외부요인과 극한의 상황에서 벌어지는 오해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박찬욱 감독이 시나리오에 작업에 참여하였기에 <고하토>의 ‘남성적 우애’를 상상했지만 <전,란>은 그런 인간적 감정보다는 계급적 대립을 앞에 내세운다.
<전,란>은 의외로 7년의 임진왜란은 짧게 다룬다. ‘선조의 도망’과 ‘겐신의 칼’을 이야기하고, 그 와중에 천영과 종려의 복수심은 증폭된다. 전란이 끝나면 왕은 무엇을 해야 할까. ‘선조’는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선조의 길을 가니 말이다.
<전,란>에서 꼭 기억해야할 것은 궤짝 속에 담긴 물건이다. 왜장은 ‘비귀’(鼻鬼)라 불린다. 그들은 조선의 군사와 백성을 죽이고 코를 벤다. 우두머리와 수괴는 머리를 베지만, 나머지는 ‘코’ 하나면 족하다. 소금통에 담아 일본의 풍신수길에게 보낼 것이다. 오늘은 조선인 몇 사람을 죽였는지 그렇게 세는 것이다. 처음에는 조선 병사의 코만 베었지만 나중에는 조선의 뭇 백성들의 코가 남아있지를 못할 지경에 이른다. 실제 역사기록에는 코가 베었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고 전한다.
<전,란>의 시작은 정여립이다. 정여립은 역모, 모반의 혐의로 효수된 인물이다. 정여립이 실제 왕을 끌어내리고, 누구나 그 왕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대동사회를 꿈꿨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옛날 진시황이 죽자 농민출신의 진승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라며 반란을 일으켰다. ‘성공하면 혁명이고, 실패하면 반역’인 것이다. 선조와 종려 같은 극 보수주의자가 경복궁에 똬리를 틀고 있는 이상, 천영과 범동 등이 아무리 칼을 들고, 도리깨를 들어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어쩌면 <전,란>은 인류역사의 발전 도상에서 ‘대동’(大同)은 고사하고 ‘온포’(溫飽)에도 이르지 못한 좌절의 역사를 담고 있는 것이다.
넷플릭스 <전,란>은 볼 가치가 넘치는 역사물이다. 한 번은 선조의 무능에 분노하고, 두 번째는 ‘코를 잃은 뭇 백성에 대해 생각해보고, 세 번째는 대동사회가 가능한지에 대해 생각해 보시길. 물론, 강동원, 박정민, 정성일이 휘두르는 검법을 보면서 정창화 감독의 검과 쇼브러더스의 칼을 비교해보는 것도 액션영화를 즐기는 방법일 것이다.
▶전,란 (Uprising) ▶감독: 김상만 ▶각본: 신철, 박찬욱 ▶출연: 강동원, 박정민, 김신록, 진선규, 정성일, 차승원 ▶제작: 모호필름, 세미콜론 스튜디오 ▶제공: 넷플릭스 ▶공개:2024년 10월 11일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사진=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