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열리는 국제영화제는 익숙하지 않은 세상, 미지의 세계를 영화관객에게 소개해 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때로는 '해방구의 역할'로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부산국제영화제의 ‘다이빙 벨’이 상징한 것처럼 영화라는 것은 언터처블의 예술작품으로 인식된다. 순전히 영화제 프로그래머의 예술적 심미안에 의해 선택된 영화를 보면서 당대의 시대상을 한 번쯤 되돌아보고, 세계사적 흐름을 나름대로 짚어보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다. 지난 주 막을 올린 제16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상영된 다큐멘터리 <풀>을 보면 그런 경향성을 이해할 수 있다.
<풀>은 〈깔깔깔 희망버스〉(2012)와 〈재춘언니〉(2020) 등의 작품을 만든 이수정 감독의 신작이다. 그의 작품들이 당대의 이슈와 주류 매체에서 주목 받지 못한 인물군상을 다뤘기에 이번 작품 <풀>도 기대되는 작품이었다. 이번 영화에서는 ‘풀’을 다룬다. 들판에 자라는 잡초의 끈질긴 생명력을 다루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금기시 되어온 ‘대마’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오래 전부터 대중문화 쪽에서는 ‘대마초-히로뽕-마약’이 전해주는 이미지가 있다. ‘사회정화의 차원’에서 가끔 터지는 문제이니까. 그런데, 갈수록 강해지는 향정신성 의약품과 세계를 골병 들게 만드는 마약류 틈 사이에서 ‘대마’는 오래도록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이수정 감독은 이 요망한 ‘풀’을 어떻게 설명할까. 그리고, 이 작품을 보는 사람에게 어떤 ‘가이드’를 하려는 것일까.
<풀>은 이 땅에서 ‘금지된 씨앗’ 대마의 씨를 땅에 뿌리고, 가꾸고, 활용하는 사람들을 쫓아간다. ‘대마’가 완전 금지된 독극물은 아니다. 얼마 전 백종원이 백팩을 매고 찾아서 푸짐한 만찬을 펼쳤던 안동포타운에서는 수의 등에 이용되는 대마를 키운다. (tvN <백패커2>) 이런 곳은 관청의 허가를 받아 대마가 재배되고, 수확되고, 활용된다. <풀>에서는 그런 식으로 대마를 심는 사람을 만난다. 접경지역 파주에서 대마를 심고 가꾸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관청의 허가를 받아 대마 씨를 뿌린다. 대마는 성장이 빠르다. 쑥쑥 자란다. 넉 달 만에 3~4미터 높이로 자란다. 수확할 때는 관청에서 사람이 나온다. 다 자란 대마를 자른다. 잎을 다 떼어내면 줄기는 수수깡 같기도 하고 대나무 장대 같기도 하다. 잘라낸 대마 잎은 땅에 모조리 파묻는다. (그 잎을 말려 대마초로 흡연하면 현행법 위반이 되는 셈이다) 이수정 감독은 파주뿐만 아니라 이 땅 어디선가에서 대마에 관심을 가지고 재배하는,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몰래 키우는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명분’을 들어본다. 어떻게 대마에 관심을 가졌고, 왜 재배하고, 무엇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는지.
<풀>을 보게 되면서 많은 정보를 얻게 된다. 물론 암스테르담의 커피숍 이야기나 미국 히피의 역사도 곁들인다. 그러면서 점점 대마의 효용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마약’과는 백만 마일이나 먼 것 같은 효용/활용법이다. 대마 성분은 오래전부터 의료용으로 활용되었다. 하다못해 <동의보감>에도 나온다.
이수정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대마의 합법화를 부르짖거나 음지에서 몰래 키우는 사람들의 관상용을 허하라 같은 과격한 목소리를 내지는 않는다. 실제 여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화초재배자 같은, 접경지 평화운동론자 같은 ‘식물 같은 사람’들이 나온다. 그래서, 미국의 한 시대를 풍미한 히피들의 사회일탈을 예상했다면 큰 오산이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대마산업 활성화 및 관련법 개정을 위한 대토론회’ 행사(2022.11.12.)이다. 여야 다선 국회의원들이 대거 참여하여 축사를 하고, 사진도 찍었다. 한 의원은 “옛날 생각이 난다. 어렸을 때 집에서 삼을 키웠었다. 찌고, 껍질 벗기고 했던 기억이 난다. 현재 의료용으로 가치가 있는, 의약식품으로서의 효용이 뛰어난데 규제가 많은 모양이다.”고 말한다. 물론, 의료용, 산업관련 활성화를 위한 자리일 것이다.
<풀>을 다 보고 나면, 이수정 감독이 <풀>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전해주려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허하라!’로 과격하게 말하는 것도 아니고, ‘위험하다!’고 소리치는 것도 아니다. 대신, 이어지는 ‘다음 번 작품’을 통해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를 포함해 영화제에선 별의 별 영화를 다 상영한다. 누군가에게는 꽤나 도움이 되는, 연대의 공간이 되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참, '어떤 방면에 길이 들어서 아주 익숙해지다'는 뜻으로 쓰이는 '이골이 나다'는 표현은 가늘게 실을 삼을 때 이로 한 올 한 올 추려내느라 앞니 사이에 골이 파이도록 힘든 과정을 겪는데서 연유한 말이다.
▶풀 ▶감독:이수정 ▶출연: ▶88분 ▶제16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상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