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정보, 폭주하는 기술, 광분하는 사회. 박자를 놓치면 영원히 낙오될 것 같은 구도에서 지금 매달리고 있는 모든 것을 내던지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현대의 경쟁사회에서 숨 막히던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자기 몸속 DNA에 웅크리고 있을 원초적인 욕망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짧은 휴가나 한 달 살아보기가 아니라 인터넷도 안 되는 낙원으로 사라져버리고 싶은 것이다. 여기 그런 남자가 있다. 파리에서 로봇공학 엔지니어로 일하는 피에르이다. 그의 갑작스러운 선택을 따라가 본다. 25일 개봉된 프랑스 토마스 살바도르 감독의 영화 <산이 부른다>이다.
영화는 파리의 평범한 직장인 피에르의 일탈에서 시작한다. 피에르는 알프스 몽블랑의 눈 덮인 설산이 바라다 보이는 호텔 세미나실에서 아마 자신이 개발한 신제품을 시연하고 있는 모양이다. 로봇 팔이 사람의 의도대로 부드럽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인다. 피에르는 이내 칭밖으로 보이는 알프스에 매료된다. 그리고 근처 등산장비 가게에 가서는 일인용 산악텐트를 비롯하여 장비들을 서둘러 산다. 그리고는 산으로 올라가서 하루를 머무른다. 이제는 저 산을 정복할 마음을 먹은 모양이다. 전문가이드의 도움으로 함께 능선을 오르기 시작하고, 자기의 베이스캠프를 마련하고 영원히 그 산에 들어앉을 모양이다. 직장동료들은 그의 선택을 응원하지만, 걱정이 되어 달려온 가족들은 곤혹스러워한다. 피에르는 산에 위치한 레스토랑의 세프 레아(루이스 부르고앵)에게 엽서를 부쳐달라고 부탁했던 일을 계기로 친밀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제 피에르는 저 산에 얼마나 머물 것이며, 얼마나 고행을 할 것인가. 그리고 레아는 어느 선까지 그의 선택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영화는 높은 산봉우리, 눈과 낙석, 그리고 크레바스가 웅크리고 있는 설산에서의 고독한 산악인의 모험을 그린다. 영화는 눈 덮인 알프스 설산이 배경인 만큼, 그리고 고독한 알피니스트의 산행을 그리는 만큼 장엄하고, 우아하고,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장관을 끝없이 보여준다.
토마스 살바도르는 8년 전, 아주 독특하고 유쾌한 <빈센트>라는 영화로 데뷔했다. 이 영화도 그 작품의 연장선상에 있다. 토마스는 어릴 적 꿈이 ‘고산(高山) 가이드, 영화 제작자, 고산 영화 제작자’였을 정도로 산에 매료되어 줄곧 산과 관련된 다큐제작에 헌신했다. 이 작품은 원래 프랑스의 전설적인 산악인 파트리크 베로(Patrick Berhault 1957~2004)와 함께 찍고 싶었단다. 감독이 생각한 이야기는 산에 올라가 더 이상 내려오고 싶어 하지 않는 젊은 산악인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였단다. 그런데 베로는 산에서 사망한다. 친구 산악인의 사고에 충격을 받은 그는 20년이나 지나서야 다시 이 이야기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 미지와의 조우
<산에 오르다>는 고산산악인의 도전과 실종, 구조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어쩌면 히말라야의 고산이 아니라 티베트의 움막집에서 깨우치는 구도의 영화이리라. 토마스 살바도르 감독은 그런 이야기를 도식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심연의 생명체와의 죽음 앞 조우처럼 담아낸다. 피에르는 극한의 상황, 결정적인 순간에 뜻밖의 물체와 마주하게 된다. 아무도 없는 설산의 깊은 공동(空洞) 속에서 묘하게 빛을 발하는 존재이다. 환상적이며 오묘하며, 영적이기까지 하다. 그런 미지와의 운명적 만남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클로즈 인카우트>와 연결되며 카메론 감독의 <어비스>와의 조우인 셈이다. 그 생명체가 무엇일까. 피에르의 환상일 수도 있겠지만 감독의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도시의 현대인은 몰랐던, 설산에서 아주 오랫동안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원시적인 생명체가 지구인, 현대인, 자유인 피에르와 ‘근접 조우’, 터치를 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리라. 빛은 환상적이며, 감각적이다. 그 빛은 결국 피에르와 레아와 연결될 것이다.
이 영화는 감탄할 만한 알프스의 풍광을 배경으로 방황하는 현대인이 동굴에서 미지의 존재와 만나는 이야기이다. 고도 3800미터에서 피에르가 만나는 것은 미지의 존재, 원시의 생명체, 그리고 환상이다. 그런 이미지를 빼고 나면 남는 것은 결국 피에르와 레아의 로맨스인 셈이다. 로맨스를 얻기 위해, 사랑의 힘을 받기 위해 너무나 힘든 길을 나선 셈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곳은 프랑스 동쪽, 이탈리아와의 국경을 따라 길게 뻗은 알프스 산맥의 샤모니몽블랑(Chamonix-Mont-Blanc) 지역이다. 한국 관광객들도 많이 찾아간다는 에귀유뒤미디(Aiguille-du-Midi) 전망대가 나온다. 혹시 이 영화를 보고, 그 산에 간다면 ‘반짝이는 신비의 존재’를 찾아보고 싶지 않을까?
▶산이 부른다 (원제: La Montagne/ The Mountain) ▶감독: 토마스 살바도르 ▶출연: 토마스 살바도르, 루이즈 보르고앙, 마틴 슈발리에 ▶수입/배급: (주)슈아픽처스 ▶개봉:2024년9월25일/12세이상관람가/113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