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뉴스에서 눈길을 끈 것은 서울대(경제학부)에서 이번 가을학기부터 마르크스경제학 강의를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1980년대 후반 우리나라 대학가에 불꽃처럼 번졌던 사회과학분야 최고의 스타(?)였던 ‘학설’ 혹은 ‘이데올로기’가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오늘밤 KBS 1TV [한국영화클래식] 시간에 방송되는 한국영화 <장마>를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맑스-엥겔스를 누가 공부할까처럼, 그 옛날(그래봐야 반세기 전!) 한국영화는 과연 누가 볼까이다. 그래도 유현목 감독이라면 우리시대 최고의 충무로 명감독이었는데 말이다. 음, 유현목을 처음 들어봤다고? 그럼 이번에 입문하시길.
영화 <장마>는 소설가 윤흥길이 1973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배경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한반도 남쪽의 한 시골마을이다. 인민군이 점령했다가 국군이 수복하자 ‘빨갱이’들이 인근 산으로 숨어들어가 빨치산 투쟁을 벌일 때의 일이다. 특별한 시기, 특별한 공간에 사는 어린 동만이 보는 ‘전쟁의 상흔’이다. 할머니와 아버지, 엄마, 삼촌이 살고 있는 이곳에 외갓집 식구들이 피난을 온다. 외할머니와 서울에서 대학 다닌다는 외삼촌, 이모가 한 집에 살게 된다. 그런데, 인민군이 쳐들어오자, 서울의 외삼촌은 뒷산 대나무 숲에 숨는다. 서울 외삼촌을 우러러보면서도 괜한 질투를 느끼던 삼촌은 붉은 완장을 차고, 평소 자기를 깔보던 마을 사람들을 들쑤시기 시작한다. 이제 아들 세대의 대립은 극한 대결로 치닫는다. ‘빨갱이’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고 오열하는 외할머니,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되었냐고 생난리치는 친할머니, 그리고, 초콜릿 하나 때문에 외삼촌이 있다는 것을 말해버린 동만까지. 지루한 장마 속에서 시골마을은 전쟁의 비극을 실감하게 된다.
● 윤흥길의 소설과 유현목의 영화
윤흥길의 소설은 1979년에 영화로 만들어진다. 당시 한국영화산업은 ‘계몽, 문예, 반공’영화로 지탱되고 있었다. 이런 영화를 만들어야, 외화수입권(쿼터)이 주어졌던 시절이다. 유현목 감독은 이런 작품을 잘 만들었다. 그것도 아주 잘! 황해도 출신의 유현목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하던 중 연합군(미군)의 폭격으로 아버지와 동생이 죽은 가족사가 있다. 그리고, 1961년 감독한 <오발탄>으로 한바탕 고초를 치러야했다. 윤흥길의 원작은 윤삼육의 시나리오에서 ‘남과 북의 대치, 전쟁이라는 비극에 훨씬 풍성한 상징과 한국영화사적 성취를 이룬다. 바로 이데올로기의 대치라는 상상가능한 대결구도에 샤머니즘이라는 정수를 집어넣은 것이다.
영화는 당대 명배우들의 명연기를 만나볼 수 있다. 첫 장면부터 시선을 사로잡는다. 계속 쏟아지는 장맛비 속에서 마루에서 완두콩을 까는 외할머니(황정순)는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비속에서 울리는 천둥소리는 적들이 쳐들어온다는 봉화 신호와 함께 포 소리와 총 소리가 마을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다. 인민군과 국군이 차례로 마을을 접수할 동안, 무지렁뱅이 삼촌(이대근)은 완장에 우쭐하여 부역질에 나서고, 자신의 과오를 숨지기 위해 죽창으로 마을사람들을 찔러 죽인다. 그리고 상황이 역전되자, 쏟아지는 빗속에 외할머니는 내리치는 천둥을 향해 빨갱이들을 쓸어가라고 고함치고 그 소리가 친할머니의 신경을 건드린다. 좁은 집안에서 냉전이 펼쳐진다. 마지막은 드라마틱하다. 친할머니는 마을 무당이 곧 아들(이대근)이 산에서 내려올 것이라고 하자, 마음을 놓고 잔치를 준비한다. 그런데, 아들은 내려오지 않고, 대신 집에 구렁이 한 마리가 기어들어온다.
소설에서는 나무를 칭칭 감는 구렁이인데, 영화에서는 뱀 한 마리가 꿈틀댄다. (특수효과도, CG도 아니다) 외할머니가 나서서 그 구렁이가 (이미 죽은) 삼촌의 넋이라며 달랜다. 구렁이는 나무에서 내려와 집안 마당을 지나 대문 밖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두 할머니는 그제야 화해한다. 이는 장마도 그쳤다.
윤흥길 작가는 이 소설을 쓸 때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었다고 한다. 당시(1970년대 초) 반공주의가 나라 전체를 지배하던 시절이었으니. 그걸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화자를 어린아이로 두었다고. 좌우익 이념을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의 시각에서 뭔가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으로. 그런데, 마침 1972년도에 남북 간에 화해 분위기가 생겼던 것이다. 이후락(중정부장)이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나 남북합의서를 발표한 것이다. 윤 작가는 이때라고 생각하고 <장마>를 발표한 것이란다.
‘516군사혁명’정부로부터 <오발탄> 상영중지를 당했던 유현목 감독의 영화에 대한 의지는 확고했다. 1965년 <7인의 여포로>를 연출한 이만희 감독이 반공법 위반으로 옥고를 치르자 한 세미나에 참석하여 헌법에 규정된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운운하며 비판적 시각을 펼쳤다. 이 때문에 그 또한 반공법으로 입건되었고, 당시 개봉된 자신의 영화 <춘몽>은 음화반포 혐의까지 더하여 기소된다. 유현목 감독은 ‘김약국집 딸들’(63), ‘춘몽’(65), ‘막차로 온 손님들’(67), ‘카인의 후예’(68), ‘분례기’(71), ‘사람의 아들’(80) 등 ‘문예작품’을 꾸준히 만들며 한국영화의 문학적 성취를 높였다.
참, 영화를 보면서 ‘지금 시점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장면이 있다. 외할머니가 자고 있는 외손주의 바지춤에 손을 넣어 만지작거리며 “즈이 오삼춘 타겨서 붕알도 꼭 왜솔방울맹키로 생겼지…”하는 장면이 있다. 참, ‘거시기’다. 요즘 같았으면 큰일 날 일이다.
KBS가 한국영상자료원과 손잡고 기획한 <한국영화클래식>은 지난 주 방송한 고영남 감독의 <소나기>를 시작으로 찬란한 한국영화의 위대한 영화들을 꾸준히 소개할 예정이다. 다음 주는 제목은 익히 들어봤을 ‘월하의 공동묘지’(1967)가 시청자를 찾는다.
▶장마 ▶감독: 유현목 ▶원작:윤흥길 ▶각본:윤삼육 ▶촬영:유영길 ▶출연: 황정순(외할머니) 이대근(삼촌 순철) 김신재(친할머니) 김석훈(아버지) 선우용녀(어머니) 박정자(고모) 강석우(외삼촌) 최용원(동만) ▶제작:남아진흥 ▶개봉:1981년5월14일/114분 ▶2024년 8월 25일 KBS1TV '한국영화클래식'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