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KBS 1TV 독립영화관 시간에는 오랜만에 한국영화가 아닌 외국영화가 시청자를 찾는다. 작년 2월 극장에 잠깐 내걸린 영국영화 <애프터썬>이다. 먼저 ‘애프터썬’이란 것은 햇볕에 탄 피부에 바르는 크림을 이야기한다. 뜨거운 태양 아래, 햇볕에 나가기 ‘전’에 바르는 것이 아니고, ‘사후’에 바르는 것이다. 그 의미를 알고 영화를 보면 더 좋을 것이다.
영화는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이다. 얼마 전 이혼 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아버지는 딸과 함께 튀르키예로 여름 여행을 온 것이다. 아버지는 곧 서른 한 번째 생일을 맞을 것이다. 딸은 이제 열 한 살이다. 아버지가 일찍 결혼한 모양이다. 호기심 많은, 그렇다고 사춘기에 눈을 뜨기에는 아직 어린 것 같은 딸과의 이국 여행이 어떨까. 이 부녀는 열심히 캠코더로 여행의 순간을 담고 있다. 영화는 그렇게 녹화된 영상을 이제 어른이 된 딸이 돌려보며, 그 때를 회상하는 것이다. 그 때의 나는 어렸고, 아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어린 아이였을 때는 몰랐던 ‘어른’의 슬픔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캠코더로 여행지 풍경을 찍던) 1990년대 후반. 스코틀랜드 11세 소년 소피는 아버지 캘럼과 함께 튀르키예 휴양지로 여행을 온다. 휴양지는 평화롭고, 아늑하다. 숙소와 수영장, 인근 산과 바다를 오가며 시간을 보낸다. 소피가 기억하는, 녹화된 영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낯선 곳에서 만나는 즐거운 광경이다. 아버지의 모습은 여느 아버지와 같다. 소피는 휴양지에서 또래 남자 애와 아케이드 게임도 하고, 청춘 커플들의 데이트도 보게 된다. 그 사이 아버지는 틈틈이 책을 읽고 있고, 정신수양이라도 하는 듯 태극권을 익히고 있다. 그런 아버지와 딸의 평범한 휴가지 호텔 풍경 같다. 그런데, 조금씩 달라진다. 그 때는 소피가 노느라, 어울리느라 놓쳤던 것인지 모른다. 어린 소녀의 눈에는 손목에 찬 노란 팔찌가 신기하다. 그걸 찬 손님은 음료를 무료로 마실 수 있다니.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돈이 없는 모양이다. 조금씩 알게 된다. 식당에서도, 양탄자 가게에서도 돈을 못 치르는 것을 지켜본다. 아버지의 상황이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아버지는 당시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애써 아닌 척 하지만 증세는 확실하다. 비디오에 담긴 아버지의 행동,어색한 웃음, 그리고 내뱉는 말들이. 소피는 아버지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싶지만 아버지는 나서지 않는다. 소피는 혼자 ‘Losing My Religion’(REM)을 불러야 했다. 그날 밤, 소피는 또래 남자 아이와 첫 키스를 한다. 방에 오니 아버지는 알몸으로 엎드려 자고 있다. 다음날 딸은 생일을 맞은 아버지를 위해 축가로 ‘For He's a Jolly Good Fellow’를 부르지만 아버지의 눈빛은 흔들린다. 마지막 날 밤, 데이빗 보위와 퀸이 함께 부른 ‘Under Pressure‘ 곡에 맞춰 춤을 춘다. 그리고 공항에서 작별한다. 딸은 엄마에게, 아버지는 공항 복도를 걸어 문 안으로 사라진다. 마치 화려한 조명이 내뿜는 무도장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이제 ’그 아버지‘ 나이가 된 딸 소피는 비디오를 보며 아버지를 생각한다. 아버지는 이미 자살했다고 해석한다. 어린 딸은 그 때 아버지의 아픔, 불안, 고통, 슬픔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애프트썬>은 아버지와 딸이, 단 둘이 ’엄마 없는‘ 단란하고 행복한 여름휴가의 추억을 담은 성장드라마로 보다가, 어느 순간 크게 한 방 얻어맞는 것이다. 폴 메스칼과 프랭키 코리오의 뛰어난 연기와 감독의 섬세한 연출로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들, 추억과 회한을 속삭이듯 전해준다. 오늘 넷플릭스에서는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와 애플TV+에서는 <파친코> 시즌1이 시작된다. 밤 11시 30분, KBS 1TV <독립영화관>에서는 <애프트썬>이 방송된다. 하나를 고르라면 이 작품을 추천한다. 부부가 봐도, 가족이 봐도, 커플이 봐도, 한동안은 먹먹해질 걸작이다.
▶애프터썬 (원제:Aftersun) ▶감독/각본:샬롯 웰스 ▶출연:폴 메스칼, 프랭키 코리오 ▶개봉: 2023년 2월 ▶2024년 8월23일 KBS 1TV 독립영화관 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