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마음가짐, 혹은 방법론의 문제이다. 여기가 싫으면 저기로 가면 된다. 이전 세대에서는 결단을 내리기 전에 생각할 게, 책임져야할 게, 그리고 국가에 대한 괜한 부채의식이 있어서 주저했었다면 요즘 MZ세대에게는 그런 미련이 없다. 여기 계나가 그렇다. 계나가 한국을 떠난 이유는 이기적이라든지, 패배주의 때문만은 결코 아니다.
28일 개봉하는 영화 <한국이 싫어서>는 장강명 작가가 2015년에 내놓은 소설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사회에서 평생 한국사람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의 효용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던 계나는 20대 후반에 훌쩍 한국을 떠나 이국(異國)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아르바이트와 시급제로 버티며 거주권, 시민권을 따기 위해 발버둥 친다는 이야기이다. 한국의 가족, 친구, 대학동기들은 계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으며, 이국 땅에서 만나는 또 다른 한국인에 대해 계나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한국이 싫어서>는 한국에 살면서 느끼는 부조리나 불합리, 그리고 ‘헬조선’으로 대표되는 절망감을 벗어나기 위한 선택과 결단을 이야기한다.
계나네 가족은 연립주택에 산다. 재개발이 되기까지 한겨울엔 오리털파커를 입고 버텨야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어렵게 취직하지만 대한민국의 그런 20대 여성직장인의 삶은 상상가능하다. 마을버스에, 만원 지하철에 시달리며 출근한다. 직장? 점심시간이면 메뉴판을 앞에 두고 뭘 먹을까 고민할 겨를도 없이 상사가 시킨 찌개로 통일된다. 업무란 것은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상사의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따라야하는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계나는 그런 직장이, 그런 가족이, 그런 사회가, 즉, 그런 한국이 싫어진 것이다. 물론 그래서 훌쩍 떠난 호주(뉴질랜드)가 더 나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곳에서 이를 악물고 버티고, 그들과 부대끼고, 세컨드 라이프를 살면서 자신의 길, 삶을 모색하는 것이다.
올해 초 개봉된 <댓글부대>의 작가이기도 한 장강명 작가는 공대를 나와 건설회사를 다녔고 그러다가 신문사 기자가 된다. ‘동아일보’에서 11년 동안 기자로 굴렸다면 한국의 모든 것, 환희의 얼굴에서 민낯의 치부까지 그 두꺼움과 얇음을 다 지켜봤을 것이다. 그가 직종에 대한 염증이었는지, 창작에 대한 열망이었는지 어느 순간 잘 나가는 소설가가 된다. ‘기자가 싫어서’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한국이 싫어서>에서는 계나가 호주(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난다. 작가는 호주의 한국유학생과 한국인 커뮤니티에 대해 많은 리서치를 했을 것이다. 번듯한 유학이 아니라, 도망치듯 떠나는 어학연수에서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패배자, 혹은 도전자를 보았을 것이다. 호주를 선택된 것은 계나의 숙소에서 내다보이는 오페라하우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경찰서에서 체감하는 백호주의의 폐해를 보여주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로 옮겨지며 계나의 목적지는 호주가 아니라 뉴질랜드가 되고, 가족은 세자매가 아니라 둘로 축소된다.
계나가 한국을 싫어한 이유가 무엇일까. 단지 가족의 굴레나 직장에서의 부조리 때문일까. 소설에서는 대학(여자)동기 이야기가 몇 차례 나온다. 계나가 이들과 만나면 나누는 대사는 정해져 있다. 먼저 결혼하거나 대학원에 진학한, 먼저 취직한 동기들과 만나 나누는 이야기는 ‘시월드 험담하기’ 류이다. (남자들이 만나면 술자리에서 무슨 이야기할지는 뻔하다. 한국을 싫어한다면!) 일반화 시킬 수는 없지만 그런 청춘들의 미래는 정해진 것 같다.
계나에게는 오래 사귄 남친이 있다. 지명이라고 부잣집 아들이다. 계나가 상견례에서 주눅이 들만큼. 인생이라는 두꺼운 자서전에서 보자면 그냥 스쳐지나갈 한 챕터에 나오는 인물이다. 누군가 먼저 취직하거나, 상대에게 먼저 실망하게 된다면 자연스레 헤어질 그런 사이. 그런데 이 인물도 한국의 현실을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지명은 결국 방송사 기자가 된다. 계나가 한국에 잠시 들렀을 때 보게 되는 남친은 밤늦게야 퇴근하고, 그 다음날 겨우 일어나서 힘겹게 문을 나서는 모습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충분히 힘들고 괴로운 직장인의 리얼한 현재 모습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안정된 미래, 남부러울 것 없는 노후를 보장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한국이 싫어서>에서는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톰슨 가젤 같이 ‘무리에서 떨어진’ 경쟁력 없는 존재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추운 것을 못 견뎌 마침내 하와이까지 배를 타고 모험을 떠나는 펭귄 파블로 이야기를 전해준다. 태어났으니 어떡하겠냐가 아니라, 자기의 의지로 새로운 세상을 개척한다는 점에서 계나의 첫걸음은 실로 위대하다. <한국이 싫어서>는 애플tv+ <파친코>와는 또 다른 지도책이요, 코리아리포트이다. 좁은 방구석 삿대질보다 넓은 바다에서의 익스트림스포츠가 낫다는 것이다.
참, <한국이 싫어서>는 'n번방'이나 '이태원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나온 이야기이다!
▶한국이 싫어서 ▶감독/각본:장건재 ▶원작: 장강명 ▶출연: 고아성, 김우겸, 주종혁, 정이랑, 김지영, 박성일 ▶배급:디스테이션 ▶제작:모쿠슈라 ▶공동제작:㈜영화적순간, ㈜싸이더스, ㈜인디스토리 ▶개봉:2024년 8월 28일/107분/12세이상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