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가 ‘한국영화 100년’을 되돌아보는 특별한 장기 기획물을 시작한다. 한국영화의 역사는 정확히는 100년이 더 된다. 1919년 단성사의 박승필은 당시 인기를 끌었던 '연쇄활동사진극'을 한국사람이 직접 제작하기로 하고 신극계에서 이름을 떨치던 김도산에게 감독을 제안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의리적 구토’라는 작품이 처음 공개된 ‘1919년 10월 27일’을 우리 영화의 기점으로 쓰인다. 한국영화 ‘100년 플러스 5년’을 맞아, KBS는 <한국영화클래식>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영화사의 대표작 100편을 편성하여 시청자를 찾아갈 예정이다. 그 첫 번째 작품으로 오늘 밤 12시 15분 <소나기>가 시청자를 찾는다. 황순원 원작의 단편소설을 고영남 감독이 메가폰을 든 1979년 작품이다. UHD화질로 리마스터링된 <소나기>는 ‘1979년’ 만들어진 작품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컬러 감으로 시청자를 놀라게 할 듯하다. 그리고 한국인이라면 다 아는 황순원 원작의 순수한 동심의 이야기가 고영남 감독에 의해 얼마나 감각적으로, 성숙한 드라마로 완성되었는지 또 한 번 놀라게 될 것 같다.
‘석이’는 서울에서 전학 온 ‘연이’를 마을 어귀에서 처음 마주치게 된다. 연이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증조할아버지인 윤영감 댁에 내려온 것이다. 서울에서 시골로 내려온 맹랑한 연이는 항상 그 자리에서 석이를 기다리며 친해지려고 하지만 석이는 왠지 멋쩍어 피하기만 한다. 석이는 남자답게, 괜히 센 척 보이려는 마음도 있다. 그런데 연이가 며칠 보이지 않자 서운하다. 어느 날 연이를 괴롭히던 아이들과 싸운 일을 계기로 둘은 친해지게 된다. 연이가 저 멀리 보이는 산으로 놀러 가자고 하자, 쇠풀 먹이는 것도 제쳐두고 신나게 산으로 놀려간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자, 연이에게 윗옷을 벗어주고, 수숫대 속에 나란히 앉아 비를 피한다. 강물이 불자, 연이를 업고 건네준다. 그리고 또 한동안 연이가 보이지 않는다. 윤 영감 집에 다녀온 아버지가 어머니에 하는 말을 듣게 된다. 연이가 죽었다는 것이다. 석이는 울면서, 연이와 추억이 서려있는 그 개울 다리로 달려간다.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는 1953년에 발표되었다. 소설에서는 소년, 소녀의 이름이 없다. 단지 서울에서 내려온 윤초씨네 증손녀인 ‘소녀’와 그를 지켜보는 시골 ‘소년’으로 등장한다. 소설은 아무리 상상력을 보태더라도 소년과 소녀의 투박한 만남과 어색한 관심, 그리고 섬세한 동행으로 애틋한 첫사랑의 그림자만 느끼게 한다. 그런 이미지 때문에 이 작품은 오랫동안 한국인의 사랑을 받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979년 충무로에서 만든 <소나기>는 놀라울 정도로 영화적 상상력을 보탠다. 마치 흑백의 세상에서 아날로그의 우정극을 나누는 소년, 소녀는 컬러풀한 세상에서 시간대를 초월하는 밀당 로맨스의 전범을 보여준다. 물론, 당시 영화계(제작사)의 상업적인 요구사항에 순응해야하는 제작시스템 때문일 것이다.
‘분홍 스웨터의 단발머리 소녀’는 빨간 미니스커트를 나풀거리는 활달한 연이로 바꾼다. 소설에서 소녀가 넘어졌을 때 소년은 소녀의 무릎에 난 핏방울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가져다 대고 빠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 장면을 포함하여 여러 장면에서 ‘소년-소녀’의 캐릭터를 두고, 그 이상을 떠올리게 하는 영상미학을 보여준다.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 속 빨간 구슬 같은 것은 참, 시대를 앞서간(?) 표현주의 미학인 듯. 난감한 소년소녀 러브스토리인 셈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선정적이다거나 음란하다고 본다면 보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고 할 것 같다. 물론,당시의 영화제작시스템이나 감독(각본가)의 심오한 창작세계를 오도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주 단순한, 간단한, 무엇보다 짧은 단편소설을 장편영화로 만들 때 이보다 더 완벽하게, 화려하게, 의미 있게 만들기는 어려울 듯하다. 충분히 황순원의 원작의 감동도 맛볼 수 있고, 언제인지는 모를 듯한 한 시대를 박제한 듯한 시골의 정서를 만끽할 수 있으면, 소년-소녀의 애틋한 첫사랑을 통해, 어느 시대에도 통할 것 같은 남녀밀당의 애틋함, 아쉬움, 이별의 슬픔을 함께 느낄 수 있게 했으니 말이다. 무엇보다 황순원 문학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된다.
<소나기>의 고영남 감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감독한 영화인이다. 1964년 <잃어버린 태양>으로 데뷔한 이래 2000년 <그림일기>까지 39년 동안 모두 111편의 영화를 찍었다. 1년에 10편(1967/1969년)을 감독한 적도 있다. 이 영화에는 방송인/작곡가 주영훈도 잠깐 등장한다. 남양유업(분유) 아기모델이었고, 1971년 우량아선발대회에서 1위를 한 주영훈이 이 영화에서 ‘석이’와 싸우는 세 명의 아이로 등장한다.
▶소나기 ▶감독:고영남 ▶원작:황순원 ▶각본:이진모 ▶각색:윤삼육 ▶출연:이영수(석이) 조윤숙(연이) 유명순(석이엄마) 김민규(석이아빠) 강계식(윤영감) 김신재(할머니) 오영갑(연이 아버지 ▶제작사:남아진흥 ▶개봉: 1979년 ▶2024년 8월 18일 KBS 1TV ‘한국영화클래식’ 상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