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개봉된 임상수 감독의 영화 <그때 그사람들>은 블랙코미디이다. '내 인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의 박정희를 극도로 희회화한 이 정치드라마는 저잣거리에 떠돌던 궁정동 술판을 커다란 스크린에 옮겨놓았다. 그날(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현장의 세 인물 박정희, 김재규, 차지철만큼 영화창작자의 관심을 끄는 인물은 단연 박선호와 박흥주일 것이다. <그때 그 사람들>은 중정(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를 모티브로 한 주과장(한석규)을 정면에 내세웠다. 이른바 '궁정동 대행사'에 연예인을 데려오는 채홍사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다. 그 영화에서 김응수가 연기한 민대령이 바로 박흥주를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 명석하였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육사에 진학한 박흥주는 군인으로 승승장구하였지만 김재규의 부름을 받고 그의 수행비서가 되어 그 날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이다. 오늘(14일) 개봉하는 추창민 감독의 영화 <행복의 나라>는 바로 그 박흥주의 운명을 그린다. 그날 저녁, 중정부장을 따라 청와대 인근 궁정동 안가로 갔던 비운의 군인 말이다.
영화 <행복의 나라>는 ‘1026’과 ‘1212’를 다루지만 한국현대사의 격변의 순간을 세세하게 담지는 않는다. 술자리에서 내려온 중정부장(김재규, 유성주 분)이 대기 중이던 수행비서 박태주(박흥주, 이선균 분)에게 “오늘 해치운다.”고 말하자 “각하까지입니까?”라고 묻더니 비장하게 총을 들고 경호실 요원들을 사살한다. 그리고는 바로 군사재판이 진행된다. 합수부장이 되어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틀어쥔 전상두(전두환, 유재명 분)의 법정쇼가 시작되는 것이다. ‘김재규와 일당’은 국가전복을 획책한 내란음모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당시의 인권변호사들이 이들을 변론하기 위해 모인다. 그중 정인후(조정석)가 박태주의 변론을 담당하게 된다. 자잘한 민사사건으로 수임료나 챙기던 정인후는 마지못해, 그리고 어쩌면 아버지를 위해 재판에 뛰어들게 되는 것이다. 일단 군인신분인 박태주를 위해 재판을 지연시키려는 수를 쓰지만 야심가 전두환은 불도저, 아니 탱크처럼 재판을 밀어붙인다. 그런 전두환보다 더 정인후를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정작 박태주이다. ‘유신의 심장을 쏜 민주의 불꽃’같은 허명(虛名)이 전혀 없다. 자신은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라, 그날 총을 쏘았을 뿐이란다. 이제 일개 변호사는 ‘군인의 명령’과 ‘권력가의 야욕’에 맞서 법정 투쟁을 펼쳐야한다.
영화 <행복의 나라>는 시바스리걸의 술자리나 탱크를 앞세운 별들의 세 싸움보다는 법정에서의 공방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법정에서 못한 마음의 소리는 면회실과 골프장에서 듣게 된다. 이 영화는 <그때 그사람들>과 <서울의 봄>처럼 이미 역사가 된 순간들을 스크린으로 만나게 된다.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들, 이미 판결이 끝나 형장의 이슬이 된 사람들을 명부에서 끄집어내어 ‘선택의 순간’을 재연하는 것이다. 박정희의 공(功)과 과(過)나, 김재규의 야심이나 판단착오, 전두환의 야망이나 야만보다는 큰 역사의 흐름에 본의 아니게 끼어들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군인에 대해 조명하는 것이다. 그 군인의 길에 변호사가 있고, 권력자가 있는 것이다.
살아온 세상이 다른 권력자와 변호사는 격돌할 수밖에 없다. ‘재판은 누가 옳고 그르냐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이기고 지느냐를 가르는 곳’이라는 생각을 가진 변호사에 대해 권력자는 ‘수임료나 챙기려는 쓰레기’라고 본다. 그 변호사는 그런 권력자를 ‘너무 오래 권력을 쥐었고, 필요이상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야만이 지배하던 그 어둠의 시대에 이들의 대결은 답이 정해진 것이다. 아무리 골프장에서 일갈했다고 해도, 그것은 판타지일 뿐이다. 재판정에서 아무리 화려한 언변으로 감동적인 수사를 펼쳐도 권력의 포장도로에 묻혀버릴 신세인 것이다. 군인은 죽고, 권력자는 독재자가 되고, 변호사는 성장했을 것이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정권이 바뀌면서 역사는 다시 파헤쳐지고, 영화는 새 단장하고, 대한민국은 또 한 걸음 전진한다(고 이 영화는 전해준다).
한대수의 노래 <행복의 나라로>가 이 영화에서 김마스타의 목소리로 불린다. 가사는 "장막을 걷어라/ 나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더 보자"로 시작된다. 이 노래는 들을 때마다 무엇을, 어떤 상황인지 의문이 들었다. 사형 판결을 받고, 형무소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박흥주. 두 눈을 가리고 마지막 복도를 걸을 때 그의 귀에 이 가사가 맴돌것 같다. "광야는 넓어요/ 하늘은 또 푸러요/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
▶행복의 나라 ▶감독:추창민 ▶각본:허준석 ▶각색:추창민 ▶출연: 조정석 이선균 유재명 우현 전배수 김재철 진기주 ▶제작:파파스필름, 오스카10스튜디오 ▶제공/배급:NEW ▶개봉:2024년8월14일/124분/12세이상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