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발표된 안톤 체호프의 희곡 <벚꽃동산>이 2024년 서울에서 공연되고 있다. 연극계에서는 끊임없이 무대에 오르는 인기작가의 인기 레퍼토리이다. 러시아 몰락한 귀족가문의 라네프스카야 부인이 5년만에 자신의 영지로 돌아와서 마침내 무너지는 몰락의 순간을 허망하게 지켜만 본다. 농노의 아들이었던 ‘로빠힌’(로파힌)은 시대의 변화상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아톤 체홉의 이야기는 사이먼 스톤 연출로 ‘현대의 서울, 단순하면서도 인상적인 하얀 2층집’을 배경이 바뀐다. 원작 ‘로빠힌’은 ‘운전기사의 아들’ 황두식이 된다. 넷플릭스의 아들로 널리 알려진 박해수 배우가 황두식을 연기한다. 박해수 배우를 만나 고전을 소화한 소감을 들어보았다. <벚꽃동산>은 지난 6월 4일 개막하여 이달 7일까지 LG아트센터서울 LG SIGNATURE홀에서 공연된다.
Q. 공연이 막바지를 치닫고 있다. 소감은.
▶박해수: “아직 6번이라는 무대 위의 삶이 남아있다. 남은 공연 회수가 한 자리 수가 되니 실감이 난다. 지난 일요일 공연 끝났을 때와 지금 감정이 또 다르다. 배우들끼리 그런 이야기 많이 했다. 오늘은 비가 와서 그런지 더욱 아쉬웠다. 배우들 10명이 짧은 시간이지만 끈끈한 유대감이 있다.”
Q. 이전에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공연한 적이 있는지. 대학 다닐 때 포함해서.
▶박해수: “학교 다닐 때 <갈매기>와 <세 자매>를 했었다. <갈매기>는 여러 번 했었다. 여러 역할로. 무대감독도 했었다. 안톤 체호프 작품을 좋아한다. <바냐 아저씨>는 아직 못 해봤다. 안톤 체호프의 희비극성을 좋아하는 것 같다. 여러 인물이 나온 군상극을 좋아한다. 이 작품은 얽히고설킨 코미디이며, 비극적인 드라마이다. <세 자매>도 <갈매기>도 그랬다. <벚꽃동산>을 안 해봤기에 작품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이번에 사이먼 스톤이 한국에서 한다고 해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Q. 원작의 배경을 현대의 서울로 바꾼 것에 대해.
▶박해수: “고전의 현대적 해석이 필요하다. 고전을 지금 가져와서 잘 바꿀 수만 있다면 효과가 있을 것이다. 1900년대 초의 러시아를 똑같이 가져온다고 해서 그것이 고전의 힘일까? 지금 현재, 어떻게 위로를 전하고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그런 점을 생각하니 좋은 시도 같았다.”
Q. 사이먼 스톤과 작업 과정은 어땠는지.
▶박해수: “사이먼이 한국에 들어와서 일주일 동안 연기자들을 만나 각 캐릭터와 관련된 인터뷰를 했었다. 원작의 로빠힌 역할에 대해, 박해수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로빠힌과 나와의 공통점을 찾은 것 같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 우람했던 아버지가 왜소해진 것을 본 순간. 그것들을 사이먼이 캐치했다. 원래 로빠힌 역할과 아버지에 대한 결핍, 그리고 인정욕구를 황두식에게 발전시킨 것이다. 나머지 캐릭터도 그런 식으로 디벨롭 되었다. 자기 안에 존재하는 것들이 많이 녹아있다. 송도영(전도연)도, 강현숙(최희서)도. 비슷한 결핍이 있었을 것이다. 조금씩 기억들을 보태며 대본이 만들어진 것이다. 극중 이름도 그랬다. 내가 내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를 생각해봤다. 얼마나 고민했던가. 황두식 이름은 아버지가 지었을 것이다. 그 아버지는 아들 이름 지을 때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밥은 먹고 다녀야하지 않을까’ 그래서 ‘식’(食)자를 넣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자 사이먼이 ’두식? 오케이!‘했다.”
Q. 사이먼 스톤과의 작업 방식이 어렵지 않았나. 줌으로 리딩하고, 쪽대본을 나눠줬다는데.
▶박해수: “연습실 시스템은 배우에게 최적화 되어있었다. 화면도 크게 해놓고. 직접 볼 수 있었다. 대본을 어느 정도 완성시켜놓고 배우들이 연기하는 것을 보고, 그것에서 영감을 받아 조금씩 고쳐나갔다. 재밌으면 또 가져오고. 조금은 낯설었는데 곧 익숙해졌다. 연출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할 때마다 더 재밌는 캐릭터로 나오니까. ’사이먼은 천재다‘라는 말이 나왔다. 관찰하고, 뉘앙스를 찾아내는데 탁월한 것 같다. 사이먼 스톤은 내가 계획 없이 들어와서 연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실수를 하더라도, 대사에 얽매이지 않은 것을 좋아했다. 특이한 경험이었다.”
Q. ’전부 다 부숴버려‘라는 마지막 부분 연기할 때의 감정은?
▶박해수: “하면서 달라진 것 같다. 처음에는 그 대사를 아련한 느낌이 들게 하려고 했었다. (저택을) 부수는 것에 대한 아련함과 서글픔이 있었다. 사이먼이 그 부분에 관해서는 의견을 주었다. 정치인이 선언하듯이 대사를 해보라고. ’영혼과 사랑을 잃었다. 폭발하는 것처럼, 정치인이 유세하는 것처럼 해라‘고 했다. 이해가 안 갔다. 그 때의 내 감정은 깨져있으니. 내 자신에 대한 부정과 슬픔이 더 많이 느껴지더라. 그 부분에서 내가 뭔가를 느끼고 연기한 것은 없다. 유세하듯이. 그 말 그대로 한 것이다. 내 자신의 투영일 수도 있고,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라는 위안도 있었을 것이다.”
Q. 송도영에 대한 황두식의 감정은 무엇인가. 사모하면서, 아끼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집안의 모든 것을 장악하려는 악한인 것 같기도 하다.
▶박해수: “황두식은 현실적인 인물이라고 봤는데, 과거의 한 순간에 멈춰있는 인물이라고 느껴지더라. 아버지가 나를 때려서 피를 흘리며 모멸감을 느낄 때, 집으로 데려가 치료해준 그 순간. 아버지가 나무에 차를 들이박고 해고당해 두들겨 맞던 그 순간. 어느 정도 인정을 받기 위해서일 것이다. 탈출하기 위한 방법으로 송도영의 집안을 구하려고 한 목적이 있다. 그것이 자신의 과거에서 벗어나는 길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안에는 진실한 사랑도 있었을 것이다. 사랑이라고 느꼈지만 지나고 보니 무시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 안의 증오감이 분출할 것이다. 진정으로 돕고 싶었는데. 모든 것이 사랑이란 감정, 부모의 결핍에서 출발했지만 말이다.”
Q. 황두식과 박해수 배우의 공통점이 있다면.
▶박해수: “저에게도 결핍이란 게 있다. 인정받으려는 마음이 있다. 배우로 인정받고 싶어 했다. 내게도 무서웠던 아버지가 있다. 투박하고 사랑의 표현에 서툰 면도 비슷하다. 원하는 것이 있고, 갖고 싶은 것이 있다. 성공에 대한 목적이 분명이 있다. 물론, 과시욕은 없다. 금반지, 이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Q. 영화와는 달리 연극에서 NG내면 어쩌나. 대사를 까먹거나, 씹는 경우도 있을 텐데. 대처법은?
▶박해수: “배우들이 대사를 씹거나, 작은 실수를 한다. 대사가 안 떠오를 때는 다른 단어로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이번 공연에서 크게 실수한 적인 있다. 다행히 함께한 모든 배우들이 내가 대사를 잘못 했다는 것을 알고 자연스럽게 ’레디‘해 주었다. 무대에서 함께 하는 배우들이 서로를 믿어주고, 받아주고 하니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가 있다. 물론 그런 일은 최대한 없어야죠. 아무리 사이먼이 실수를 해도 된다고 말했지만.”
Q. 전도연 배우와는 처음 함께 연기를 펼쳐보았다.
▶박해수: “전도연 선배와 무대에서 공연할 기회가 또 있을까. 언젠가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마주칠 수 있겠지만 공연에서 만날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공연을 하면서 한동안 무대에서 서로에게 기대어야 한다. 편집이나 기술적인 도움 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기대어야한다. 1부 마지막에 송도영이 하는 대사들. 죽은 아이에 대한 트라우마, 알코올 중독 등을 이야기하는 순간, 그 순간이 너무 고맙더라. 무대라는 공간에서 좋은 경험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한 선택이었다.”
Q. 학교 다닐 때 대하던 고전과 지금 바라보는 고전의 차이가 있다면.
▶박해수: “예전에는 어렵게 접근했다. 비극에 가깝다고 느꼈는데 지금은 희극성이 더 느껴진다.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실수나 오류 같은 것은 삶에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웃긴 쪽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가치관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벚꽃동산>은 사이먼의 의도대로 실수도 하면서, 예전이랑 다르게 연기를 하고 있다. 비극적인 순간에도 희극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Q. 영화를 찍으면서 틈틈이 연극무대에 오른다. 작품을 고를 때 어떤 것을 주로 보는지.
▶박해수: “기본적으로 시나리오 고를 때처럼 대본과 작가에 많이 기댄다. 어떤 캐릭터인가, 어떤 작가적 세상이 펼쳐지는가. 그 세계관이 궁금하다. 특히 <벚꽃동산>은 사이먼 스톤은 작품하는 과정이 궁금했다. 무대경험은 꽤 있다. 10년 이상. 영화나 드라마는 아직 10년이 안 된다. 영화와 드라마를 열심히 하고 싶다. 연극에서 느낀 것을 이쪽에서도 열심히 하면, 10년은 해봐야 그 특성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도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좋은 공연이 있으면 계속 하고 싶다.”
Q. 사이먼 스톤의 연출 스타일을 싫어하는 관객도 있다.
▶박해수: “시작할 때 편견을 갖고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연극이란 것이 정보전달과 약속들로 이뤄진다.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이 있었다. 그런 것을 제쳐두고, 대사가 겹치더라고, 들려야하는 말은 들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드라마가 어디로 달려갈지를 미리 약속하거나, 클라이맥스를 정해놓고 가지 않았다. 관객들도 고전이라는 숙제, 무게감에서 벗어나서 느낄 수 있었으면 한다. ’이게 무슨 의미지?‘라고 해석할 때 놓치는 것이 있다. 고전이라기보다는 지금 이 시대의 이야기로 봐 주셨으면 한다.”
“배우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정도 있을 것이다. 배우라는 존재는 선택을 받아야한다. 연기를 잘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런 것이 배우에겐 중요한 인정욕구이다.”라고 말한 박해수 배우를 앞으로도 스크린과 모니터에서 많이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넷플릭스 <악연>과 <대홍수>, 하정우 ’감독‘의 <로비>는 이미 촬영이 끝났다고. 잠깐 나오는 프라임비디오의 <버터플라이>도 촬영이 최근 끝났단다. 또 다른 작품 <자백의 대가>는 아직 촬영일자가 잡히지 않았단다.
[사진=LG아트센터, Studio 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