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제22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SWIFF2020)가 개막되었다. ‘여성과 영화’라는 어젠더를 결합시킨 SWIFF는 확실한 컨셉트와 관계자의 열정으로 꽤나 중요한 영화제로 자리 잡았다. 올해는 코로나 사태로 제한적인 범위에서 행사가 치러지지만 영화제의 관록을 보여주듯 훌륭한 프로그래밍과 알찬 행사를 준비했다. 오래 주목받는 프로그램은 홍콩 허안화(許鞍華) 감독 회고전이다. 허안화 감독은 1970년대 초중반에 TV방송사(TVB)에서 지금 봐도 인상적인 사회파 드라마를 다수 찍었고, 홍콩 신낭조(누벨버그)의 대표주자로 홍콩영화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수많은 작품을 내놓았다. 회고전을 통해 초기 TV드라마 네 편과 <풍겁>(79), <객도추한>(90) ,<이모의 포스트모던 라이프>(06), <천수위의 낮과 밤>(09) 등 대표작 8편이 소개된다.
<천수위의 낮과 밤>(天水圍的日與夜/The Way We Are)은 2009년 개봉된 소품이다. 감독은 오래 전부터 홍콩의 ‘천수위’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고 싶어 했다. 천수위는 홍콩 북서쪽에 위치한 신도시이다. 바닷가 습지, 물웅덩이 뿐이던 이곳은 오랜 시간에 걸쳐 매립과 간척사업이 진행되었고 1990년대 들어서면서 대단위 주택단지가 건설되었다. 지금은 천수위 습지공원과 함께 고층아파트가 빼곡하게 들어섰다. 바로 이곳, 천수위에 살고 있는 진짜 홍콩서민의 이야기가 <천수위의 낮과 밤>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콰이 아줌마(포기정,鮑起靜)가 마트에서 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줌마는 오늘도 마트 과일코너에서 두리안을 둘로 쪼개어 포장하고, 고객에게 응대한다. 집으로 가는 길에 저녁 찬거리를 산다. 집에서는 아들놈(양진용,梁進龍)이 소파에 누워 TV를 보다 자는 등 하루 종일 빈둥거린다. 엄마와 아들, 둘뿐인 가족은 천수위 좁은 아파트에서 함께 저녁을 먹는다. 다음날도 똑같다. 그 다음날도. 오래전 남편을 여읜 아줌마는 마트에서 열심히 일한다. 백수 같이 보였던 아들은 상급학교 입시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언제나 똑같은 하루를 살아가는 것 같은 이들에게도 조금의 변화가 있다. 마트에서는 함께 일하게 된 동료 할머니(진려운,陳麗雲)가 알고 보니 아파트 이웃이란다. 아들도 친구집에 가서 또래랑 놀기도 하고 교회 행사에 참석하며 사람을 사귀기도 한다. 친척의 장례식장에서 외삼촌네 가족도 만난다. 평범한 일상의 연속이다. 엄마와 아들이 함께 밥을 먹고, 친척이 어울리고, 아파트 이웃과 찬거리를 고른다. 그렇게 천수위에 사는 서민의 하루가 조용히, 천천히, 변함없이 흘러간다.
이 단조로운 이야기의 영화에 묘하게 빠져든다. 아들놈이 펼치는 청소년 비행도 없고, 극한에 몰리는 서민의 자살극도 없다. 흉악한 친척의 간계나 이웃의 사기극도 없다. 그야말로, 착하고 순한, 성실한 서민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이다.
허안화 감독은 당초 2004년에 천수위에서 발생한 끔찍한 살인사건을 극화할 생각이었단다. 광동성에서 일하러 건너온 중국여자와 결혼한 홍콩남편이 아내와 어린 두 딸은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 사건이었다. 중국-홍콩의 관계가 다방면에서 급속도로 융합되면서 벌어지던 수많은 문제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을 찍기에는 제작비 조달이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허 감독은 아주 적은 예산으로 이 영화를 먼저 만든 것이다. 살인극과 중국이야기 등 무거운 이야기는 빠지고 ‘천수위’에 사는 홍콩 서민의 잔잔한 이야기만으로 채워진다.
소박하지만 진심이 관통하는 이 영화는 호평을 받았고, 허 감독은 이듬해 당초 찍으려고 했던 그 끔찍한 가정폭력을 담은 <천수위의 밤과 안개>로 완성시킨다. 이번 서울여성영화제에서 이 작품이 빠진 것은 아쉽다. 대신 허안화 감독의 1979년 작년 <풍겁>이 상영된다. <풍겁>은 1970년 홍콩 빅토리아 피크 근처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담은 미스터리 범죄스릴러이다. 허안화 감독은 올해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평생공로상인 명예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