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작가 잭 런던(1876~1916)은 불우한 환경에서 태어나 잡초같이 자랐다. 어릴 때부터 온갖 힘든 일과 사회 밑바닥 생활을 다 경험했던 그는 뱃사람이 되어 세계 곳곳을 다니기도 했다. 그의 인생역정 가운데는 ‘1904년의 조선사람 엿보기’ 기행도 있다. 사회주의자였던 그가 남긴 작품 중 가장 유명한 소설이 <야생의 부름>이다. 오래 전에 ‘야생의 절규’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것 같다. 이 원작이 다시 한 번 영화로 만들어졌고 지난 주 <콜 오브 와일드>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 벅은 훌륭하다
소설의 주인공은 ‘벅’이라는 이름의 개다. 양지바른 캘리포니아 산타클라라 밸리에 있는 밀러 판사의 대저택에 사는 개다. 세인트버나드와 셰퍼드의 피를 이어받은 벅은 커다란 덩치를 자랑한다. 어느 날 판사 집에서 일하는 사람 하나가 도박빚을 갚기 위해 벅을 빼돌린다. 저 북쪽 땅, 클로다이크에 ‘금’이 발견된 뒤 불어닥친 골드러시 열풍에 개 수요가 급증한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개는 중노동을 할 튼튼한 근육과 한파로부터 보호해 줄 두툼한 털을 가진 커다란 개다.
커다란 덩치의 벅은 갑작스레 낯선 땅에 내던져진다. 벅은 우편배달부 썰매를 끄는 것으로 두 번째 삶을 시작한다. 북국의 맹추위와 차가운 바람, 그리고 얼음판 위에서 벅은 몽둥이와 채찍, 그리고 개들의 서열싸움 속에서 온몸으로 맞서며 성장해 간다. 우편배달 일이 끝나자 벅은 또 다른 사람에게 팔려나가 더욱 힘든 썰매 끌기를 이어간다. 남쪽 동네 밀러 판사의 따뜻한 화로에 대한 기억은 잊혀지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야생의, 야성의, 원시의 늑대울음 소리에 조금씩 동요되기 시작한다.
● 잭 런던의 소설과 2020년 영화
영화 <콜 오브 와일드>는 잭 런던 소설을 비슷하게 따라간다. 어설픈 CG작업이 유난히 눈에 띄는 밀러 판사의 생일날 소동을 뒤로 하고 벅은 기차와 증기선에 차례로 실려 북쪽 황금광도시로 향한다. 어릴 때 읽은 소설에서 아직도 기억에 남은 것은, 납치된 벅이 빨간 스웨터를 입은 한 남자에게 대들었다가 호된 몽둥이찜질을 당하면서 새로운 세계의 잔인한 규율을 익혀 나가는 장면. 영화에서도 그 불쌍한 장면이 재현된다. 이후 영화는 소설의 큰 줄거리를 유지하며 세부적인 설정을 바꿔놓는다. 주인공 개 ‘벅’이 만나는 인간들이다. 페로와 프랑수아를 거쳐 스코틀랜드의 형편없는 금광꾼 할 일행, 그리고 손튼과 이어진다. 원작에서는 손튼에게는 일행이 있었지만 영화에서는 슬픈 사연을 가진 고독한 남자로 바뀐다. 그리고, 살얼음판이 꺼지면서 생기는 구조작전과 눈사태는 잭 런던은 상상도 못했을 CG의 향연으로 펼쳐진다. 아마도 원작을 본 사람이라면 가장 기대했을 장면이 있을 것이다. 손튼이 내기를 하는 장면. 천 파운드의 밀가루 포대가 실린 썰매를 벅이 혼자 끄는 장면. 아쉽게 이번 영화에는 없다. 아마, 동물의 권리가 그만큼 높아졌나보다.
● 크론다이크 골드러쉬
1896년, 미국 본토에서 저 멀리 북쪽에 떨어진 알래스카, 그 오른쪽 캐나다 땅 유콘에서 금이 발견된다. 이후 몇 년 동안 이 곳에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유명한 크론다이크 골드러쉬이다. 찰리 채플린이 배고픔에 자신의 구두 가죽을 오물오물 먹는 <황금광시대>의 배경이 된 사건이다. 3~4년 사이, 유콘의 크로다이크에는 10만 명 이상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배에서 내린 이들은 길게 줄을 서서 허가증을 받아서는 눈 덮인 산을 넘어 금을 찾아 헤맨다. 사람이 몰리니, 도시가 들어서고, 각종 부가산업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잭 런던도 이 무렵 유콘에 몰린 금광꾼 중 한 사람이었다. 그의 경험담이 어떻게든 소설에 포함된 셈이다.
● 개와 늑대의 시간
캘리포니아의 애완견 벅이 북국의 강추위 속에서 어깨에 가죽 끈을 걸친 채 무거운 짐을 끄는 썰매 개 신세가 되면서 개는 자신(!)에 대해 되돌아보게 된다. 그의 오래된 조상은 자연을 맘껏 뛰어다니며, 잔인한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웠을 것이다. 그러다 차츰차츰 사람 손에서 길들여졌을 것이다. 벅이 언뜻 보게 되는 동굴의 이미지, 불의 이글거림은 오래된 원시로의 회귀이다. 사람들이 몰려오고, 산천이 개발되면서 그 늑대들은 더 원시의 땅으로 내몰리거나, 사람 손에 길들여지겠지. 미국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시절의 모습과 자연의 장엄함, 그리고 순수한 동물의 이야기가 그려지는 <콜 오브 와일드>는 영화의 완성도와는 달리 큰 스크린에서 볼만한 영화이다.
참 영화와는 달리, 소설에서 손튼은 이하트 인디언의 화살에 맞아 죽는다. (KBS미디어 박재환)
[사진 = 영화 '콜 오브 와일드' 스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