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고인이 된 부산국제영화제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살아생전 아시아영화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미지의 영화에 대한 그의 열정으로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대만의 허우 샤오시엔(후효현) 감독이 부산을 자주 찾았었고, 그의 작품이 한국영화팬에 꾸준히 소개되었다. 갑자기 그가 생각나는 작품이 개봉된다. 지금은 세계적인 명장감독 소리를 듣는 대만 허우샤오센(후효현)이 ‘주연’ 배우로 출연한 1985년도 작품 <타이베이 스토리>이다. 감독은 양덕창이다. 영어이름인 ‘에드워드 양’으로 더 많이 알려진 대만영화인이다. 공대를 나온 양덕창은 미국에 유학 갔다가 영화를 배우고 귀국한다. 후효현 등과 함께 ‘타이완 뉴웨이브’(대만 신낭조)를 이끈 사람이다.
‘스크린 쿼터제’ 같은’ 자국영화 보호정책이 전혀 없는 대만에서는 대만영화의 시장점유율을 집계하기가 미안할 정도로 미미하다. 그 어려운 시기에 후효현의 집을 저당 잡혀 완성시킨 작품이 이 영화이다. 이 영화는 대만에서 개봉될 당시 4일 만에 간판을 내렸다. 하지만, 해외영화제에서 작품성을 인정받고(그래 봤자 잊히기는 마찬가지이지만) 한동안 ‘영화팬 필람의 클래식’이 되는 듯했다. 이 영화는 2017년 디지털 리마스터링으로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지난 7일 한국에서도 극적으로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영어제목이 ‘타이페이 스토리’인 이 영화의 중국어 원제는 ‘청매죽마’(靑梅竹馬)이다. 어린 시절부터 스스럼없이 잘 어울러 놀았던 오랜 친구를 말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 후효현(아륭)과 채금(아정)의 경우이다.
아륭은 대만 어린이야구단 국가대표선수 출신이었던 사람. 영광은 아스라이 사라졌고 지금은 (일본에 있는) 아내와 이혼수속 중이다. 타이베이에서 작은 면직물 가게를 꾸리고 있다. 미국의 매형에게 상품을 보내는 일이 그가 하는 일이다. 그에게는 아주 오랫동안 친구같이, 연인같이 사귀어 오던 여인이 있다. 아정이다. 아정은 이제 돌싱이 된 아륭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같이 세우자고 한다. 암울한 미래뿐인 대만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 가서 그곳에서 열심히 살자고.
영화는 남자 아륭과 여자 아정의 성격과 사람됨을 조금씩 보여준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했던 아륭의 곁에 남은 친구란 ‘현실에 좌절하고, 경쟁에서 도태한 낙오자’들 뿐인 듯하다. 그의 친구들은 택시기사를 하든, 술집 바텐더를 하든, 도박판에서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돈을 올 인하는 초라한 모습을 보일 뿐이다.
아정은 회사 대표에게 인정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지만 회사가 넘어가면서 실직자가 된다. 게다가 사업이란 전혀 모르는 아버지는 끝없이 빚만 지고 남 탓만 하고 있다. 아륭은 아정의 이런 사정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
1980년대 들어 대만은 그야말로 출구가 보이지 않는 난국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대륙(중국) 모택동의 사후, 국제사회에 다시 등장한 ‘등소평의 중국’은 갈수록 ‘대만’이 차지했던 지위와 역할을 앗아간다. 장개석의 뒤를 이은 장경국 총통이 집권하면서 오랫동안 대만 사회를 짓누르던 계엄 철폐를 요구하는 민주화 요구도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젊은이들은 일본을 ‘열애’하고, 미국을 ‘연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시절에 나온 영화가 ‘청매죽마’, <타이페이 스토리>이다.
영화는 당시의 정치적인, 외교적인 상황을 말하지는 않는다. 대만사람들은 이미 ‘역사적 패배자’임을 조금씩 인식하고, 그들만의 생존방식을 체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방식은 열심히 일하거나, 일확천금을 노리거나, 어딘가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영화는 또 다른 삶의 이야기를 펼친다. 전형적인 남자-여자의 이야기이다. 남자는 보수적이고 헌신적이다. 여자는 진취적이고 이기적이다. 양덕창 감독은 이런 총체적 난국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을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어이없이 종결된다.
1980년대 중반의 대만의 상황을 모르는 지금의 한국 관객에게는 한밤에 모터사이클을 타고 타이베이 시가지를 질주하는 대만청춘의 모습을 과대평가하거나, 후지필름 네온사인의 숨겨진 뜻에 함몰될지 모른다. 대만의 청춘은, 대만의 삶은, 그리고 대만의 운명은 그렇게 흘러간다.
양덕창 감독은 2000년 <하나 그리고 둘>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고, 2007년 미국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이 영화에 출연하는 채금(차이친)과는 1985년 결혼하여 1995년까지 부부의 연을 맺었었다. ‘채금’은 가수이기도 하다. <무간도>의 주제가를 부른 가수이다.
영화제목이 ‘타이베이 스토리’가 아니라 ‘타이페이 스토리’인 것은 대만의 표기법 때문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박(朴)씨 성을 오랫동안 ‘Bak’이라 하지 않고 ‘Park’이라 한 것처럼. 영진위의 박스오피스 기록을 보니, 이 영화는 개봉 후 어제까지 3500명이 관람했다고 한다. 참으로 대만스럽다! (KBS미디어 박재환)
[사진 = 영화 '타이페이 스토리' 스틸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