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의 광주 이야기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의 함성과 피로 채워진 그날들의 비극은 이제 역사의 유물이 되어간다. 해마다 5월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그날의 함성, 그날의 피울음을 되새기지만 피해자도, 가해자도, 방관자도 늙어가고, 죽어가고, 기억에서 사라져간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독특하다. 아직도 잊지 않고 기억해준다는 것이, 잊지 말라고 보여준다는 것이.
영화 ‘1980’은 영화 <서울의 봄>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전두환과 군인들이 광주시민들의 숭고한 민주화 의지를 총과 탱크, 그리고 헬기 소사로 무참하게 짓밟아버린 이야기이다. 이 장대한 비극의 서사시를 어떻게 영화에 다 담을 수 있을까. 강승용 감독은 광주도청 뒷골목에서 중국집을 하는 철수네 가족 이야기를 통해 그날의 이야기를 전한다.
철수네 할아버지(강신일)는 [화평반점]을 오픈한다. 북에서 내려온 실향민인 할아버지는 광주에 자리 잡고, 힘들게 일했을 것이고 마침내 번듯하게 자기 가게를 갖게 된 것이다. 자식농사도 잘 지은 셈이다. 큰 아들은 서울대 나왔다니 자부심이 대단한 듯. 배가 남산, 아니 무등산만큼 부른 첫째 며느리(김규리)는 가게 안팎에서 싹싹하게 열심히 살아간다. 둘째(백성현)는 투덜대지만 아버지 옆에서 가게를 도우며,오늘도 자전거로 열심히 자장면을 배달한다. 이런 가족이야기는 ‘2024년 서울 남산 아래 배민가게’라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단지, 1980년 광주라는 것이 문제이다.
영화는 저예산독립영화이다. 전두환의 쿠데타 행군은 뉴스화면과 기록필름, 그리고 중후한 내레이션으로 채워진다. 화면에 비치는 광주의 풍광은 금남로도, 도청도 ‘근사하게’ 보여주지는 않는다. 너무나 소박하게 꾸며진 세트로 그날의 비극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영화는 중국집을 새로 열어 기뻐하고, 자장면을 맛있게 먹는 모습과 함께 거리의 불온함을 조금씩 보여준다. 시위하던 학생들이 뛰어 들어오고, 군인들이 곤봉 들고 쫓아온다. 시간이 지나면서 긴박해진다. 그리고 총소리와 함께 피가 흩뿌려진다. 감독은 [화평반점]을 배경으로 그 불온하고, 불안하고, 위태로운 순간을 보여준다. 거기에 더해 화평반점 옆에 세 들어 사는 미장원, 영희네 가족을 보여준다. 영희의 아빠는 군인이다. 시위대를 잡아 죽도록 패는 군인이다. 이제 어제까지만 해도 ‘좋은 이웃사촌’이었던 이들이 이제 죽고, 죽이는, 숨고, 숨기는, 도망가고 쫓아가는 운명에 놓인 것이다.
영화는 결국 그날의 도청에서 막을 내린다. 철수 할아버지는 끝까지 도청을 사수하는 그들을 위해 맛있는 자장면을 아주 많이 준비해서는 리어카에 싣고 찾아간다. 둘째 아들도 그곳에 있고, 언젠가 그의 가게를 찾았던 학생도, 시민도, 평범한 사람도 그곳에 있다. 비장하게 마지막 야참으로 자장면을 먹는다. 그 자장면이 불어터졌다는 것도 느끼기 전에 총소리가 울려 퍼진다.
강신일, 김규리, 백성현, 한수연 등이 출연하는 영화 <1980>은 <실미도>, <왕의 남자>, <안시성> 등 30여 년을 미술감독으로 지낸 강승용 감독의 감독데뷔작이다. 그날의 광주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는 듯하지만, 광주가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헛소리를 하는 사람이 있다. 자장면을 먹을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다. 이 영화는 그 자장면의 피맛을 아는 사람만이 느낄 역사물이다. 영화는 오늘(27일) 개봉한다.
▶1980 ▶감독: 강승용 ▶출연: 강신일 김규리 백성현 한수연 전수진 민서 유오성 박준혁 ▶제작:㈜히스토리디앤피, (주)디에이치미디어, 굿픽처스 ▶개봉: 2024년 3월 27일/12세이상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