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것이 몸뚱이뿐인 청춘이지만..."
지난 주, KBS 1TV가 한국영화 100년을 맞아 방송하고 있는 ‘더 클래식’ 다섯 번째 작품으로 이장호 감독의 <바람 불어 좋은 날>이 늦은 밤 한국영화 팬을 찾았다. <바람 불어 좋은날>은 1980년 11월 27일 개봉된 작품이다. 유신이 저물고, 서울의 봄을 거치면서 여전히 암울했던 한국사회의 뒤안길을 다루며 한줄기 빛처럼 세상에 나온 충무로영화이다.
영화는 (지금은 강남-영동의 금싸라기 땅이 되었을) ‘서울변두리’ 개발지역에 터를 잡은 시골 촌놈 세 명이 펼치는 청춘의 이야기이다. 무작정 상경한 길남(김성찬), 춘식(이영호), 덕배(안성기)는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지만 청춘의 꿈을 안고 내일의 위해 오늘도 열심히 사는 청춘들이다. 그들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까.
어제까지 논밭이었고, 여전히 듬성듬성 논밭이 보이는 이 땅의 원래 거주민들은 농사지을 땅을 잃거나, (부동산업자의 농간에) 빼앗기고 정든 땅을 떠나야했다. 여관에서 일하는 길남은 진상고객과 다투면서도 꿈이 있다. ‘나까무라상도, 왕서방도 어서옵쇼 모시는 웰~컴 호텔의 사장‘이 되겠다며 한 푼 두 푼 악착스레 돈을 모은다. 이발소에서 일하는 춘식은 면도사 미스 유(김보연)를 짝사랑하지만 부동산으로 떼돈을 번 회장님(최불암)이 호시탐탐 미스 유를 노리고 있다. 순박한 덕배는 중국집 배달부 일을 하며 이들 친구들과 부대끼며 산다. 분명 나라 전체가 잘 살자고, 부자가 되자고 앞으로만 달려가던 그 시절, 이들 청춘들은 역경을 어떻게 헤쳐 나갈까.
한국영상자료원에 의해 디지털 리마스터링으로 생생하게 살아난 ‘바람불어좋은날’에서는 길동과 천호동 일대가 막 개발되기 시작하던 때의 모습,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방배동과 말죽거리 일대, 그리고, ‘선릉’이라고 사료되는 곳을 만나볼 수 있다. 영화가 전하는 인간들과 함께,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만 뭔가 생소한 서울의 모습을 대면하게 된다.
이장호 감독은 ‘못 배우고, 가진 것 없는’ 청춘의 이야기를 전해주지만 그 때, 그들과 함께 서울의 공기를 마시던 서민들의 모습을 사람냄새 나게 알뜰하게 담는다. 그 때 그 사람들은 40년 지난 지금 어떤 모습일까. 뛰어 놀던 그들의 자식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질 것이다.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작가 최일남의 중편소설 <우리들의 넝쿨>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송기원 작가가 시나리오 작업했다고 하지만 당시 수배범으로 쫓겨 다니느라 크레디트에서는 이름이 빠졌다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해에 만들어진 영화였고, 여전히 무도한 검열이 이뤄지던 시절이었지만 놀랍게도 이 작품은 감독의 의도대로 무사통과 했단다. 당시 영화검열에 참여했던 소설가 박완서의 적극적 설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최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한국영화와 검열’ 관련 행사에서 이장호 감독은 문제가 된 장면이 하나 있었다며 입대를 앞두고 김성찬이 한탄하듯이 내지르는 대사 중에 “영자를 부를거나, 순자를 부를거나, 영자도 좋고, 순자도 좋다.” 대사에서 ‘순자’가 문제였다고. (전두환 부인 이순자를 연상시킨다고) 이장호 감독은 오디오에서 ‘ㅅ’자 나오는 부분만을 삭제했는데 관객들에겐 그걸 다 알아 듣고 웃었다고 회고한다. (블루레이로 이 장면을 들어보면 제대로 오디오를 묵음처리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역배우로 명성을 날렸던 안성기가 군대 다녀와서 출연한 몇 편의 작품에서 빛을 못 보다 이 작품으로 확실히 충무로의 대표배우로 성장하게 된다. TV에서도 자신만의 아우라를 뽐냈던 고(故) 김성찬, 이장호 감독의 동생인 이영호와 함께 반가운 얼굴을 만나볼 수 있다. 임예진이 시골에서 올라온 이영호의 씩씩한 여동생으로, 유지인이 배달부 안성기를 희롱하는 강남 멋쟁이로, 김인문-김영애가 포장마차 부부로, 박원숙이 중국집 여주인으로, 김희라가 그런 박원숙에게 얽히는 중국집 종업원으로 등장한다. 이른바 ‘종합상사맨’으로 수출역군으로 일하다가 영화가 좋아 충무로에 뛰어든 청년 배창호는 이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이름을 올리고 충무로 르네상스를 이끌 준비를 한다.
1976년 연예계를 뒤흔든 대마초파동에 연루되어 한동안 손발이 묶였던 이장호 감독은 <바람 불어 좋은 날>로 한국적 리얼리즘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 <과부춤> 등은 이번에 ‘한국영화 100년 더 클래식’ 12편 목록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충분히 자격이 있는 작품들이다.
한편, KBS와 한국영상자료원이 한국영화100년을 맞아 준비한 특집기획 ‘더 클래식’은 지난 주 <바람 불어 좋은 날>에 이어 15일(금) 밤에는 여섯 번째 시간으로 임권택 감독, 김지미 신성일 주연의 <길소뜸>이 방송된다.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