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10월 27일, 일제강점기 서울 시내에 위치한 극장 단성사에서는 연극이 아닌 특별한 볼거리가 시전되었다. 연쇄극이라 불리던 ‘필름’ 상영이었다. 35mm 흑백무성필름 1권 정도의 길이였다고 하니 10분도 채 안 되는 영화였다. (필름이, 실물이 남아있지 않으니 정확한 런닝타임은 알 수가 없다) 바로, 이 날이 우리나라 국산영화 탄생의 기점이다. 올해로 100년! 한국영화 100년에 맞춰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KBS도 특별히 <한국영화 100년 더 클래식>을 편성하여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 12편을 방송한다. 지난 10월 4일, 그 첫 번째 주자로 김기영 감독의 <하녀>가 선정되었다. 우리나라 영화판에서 가장 기이한 인물로 손꼽히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 필름은 반백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만신창이가 되어 겨우 전해졌다. 영상자료원에서는 10여 년 전부터 그런 필름을 수집, 복원시키는 작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하녀>도 그런 디지털복원 작업의 성과로 새로운 관객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하녀>는 김기영 감독이 만든 수많은 ‘*女’ 연작물 중 최고의 작품이다. 1960년대 한국사회, 서울 중산층 시민의 가족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그렇다고 김기영 감독이 당시의 사회상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것은 아니다. 여공(女工)으로 가득한 공장 모습에서부터 특이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당시 여공의 패션이나, 삶의 질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김 감독이 그린 모습은 판타지에 가깝다. 노동의 시간이 끝나면 한껏 차려입고 문화생활을 향유한다. 외부에서 피아노 강사가 와서, 합창연습을 한다. 이 피아노 선생(김진규)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피아노 선생은 오랜 셋방살이를 끝내고 2층 내 집을 장만한다. 내 집 장만의 꿈을 이루기 위해 남편도, 아내도 악착같이 일했고, 지금도 일한다. 아내(주증녀)는 종일 재봉틀을 붙잡고 있다. 소아마비 딸과 아직은 철부지인 아들까지. 이들 네 가족은 ‘미래의 행복’을 꿈꾸는 중산층이다. 이 집에 불온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하녀’로 들어온 이은심 때문이다. 하녀는 주인을 유혹하고, 임신하고, 우여곡절 끝에 낙태한다. 그리고, 그 하녀는 이제, 복수를 꿈꾸며 ‘2층 양옥집의 행복한 가족’은 지옥 같은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김기영 감독은 마치 백화점 문화학교 피아노수업 같은 공장 합창수업과 베이츠모텔 같은 양옥집 1, 2층을 오가는 이야기를 밀도 있게 담아낸다. 남편과 아내, 선생과 수강생, 주인과 하녀, 그리고, 무엇보다 남자와 여자의 역할 게임은 전형적이고 상투적이면서도 도전적이다. 감독은 뻔한 갈등 구조에 소아마비 딸의 존재를 끼어 넣고, 처음부터 조심스레 등장시킨 쥐약으로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영화는 남편이 아내에게 ‘하녀와 치정에 얽힌 살인사건’ 신문기사를 읽어주면서 시작되고, 그 이야기가 그들 가족에게 펼쳐진다. 그리고, 그 지옥같은 이야기가 끝나면서 남편은 “이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보편적 이야기”라고 덧붙인다.
카메라는 좁은 집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복도, 부엌 찬장의 쥐약뿐만 아니라, 각 인물의 분노, 절망, 좌절, 의심의 그림자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영상자료원에서는 겨우 남아있는 오래된 필름을 모아 디지털로 복원해서 <하녀>를 더욱 위대하게 완성시켰다. KBS <한국영화 100년 더 클래식>은 11일 <하녀>에 이어, 18일(금)에는 또 한 편의 클래식 <오발탄>이 시청자를 찾는다. 당분간 금요일 심야에는 한국영화의 걸작을 만나는 시간이다. 김진규의 맹랑한 아들은 지금은 국민배우가 된 안성기가 맡았다. 이제는 사용되지 않는 용어 ‘하녀’를 연기한 이은심은 이 영화를 찍고 얼마 뒤 결혼과 함께 영화계를 떠났다. 브라질로 이민 떠났다고. 지난 2015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했다. ‘하녀’만큼 신기한 대사는 ‘카레라이스’를 ‘라이스카레’라고 말한다. 극중에서는.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