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 인도네시아의 정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혹시 아시는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인도네시아가 영국에서 독립하기 전까지 이 나라 또한 공산주의 세력과 싸워야했다. 인도네시아/자유주의 진영에서는 이때를 ‘말라야 비상사태’(Malayan Emergency)라고 하고, 공산세력은 ‘반영 민족해방전쟁’이라고 한다.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당시를 언급하는 영화 <잭프루트>(菠蘿蜜)가 소개되었다. ‘잭푸르트’는 동남아시아에 자라는 ‘과일’이다. ‘뽀루오미’이라고 불리는 커다란 육즙과일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여러 가지 궁금증이 일어 감독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팜플렛에는 ‘라우 컥 후앗’(LAU Kek Huat)으로 표기된 읽기 어려운 이름이다. 중국어로는 ‘랴오커파’(廖克發 료극발)이다. 라우 감독은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난 현재 대만에서 활동 중인 ‘말레이 화교’이다.
이 영화가 정식으로 소개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그래서 영화를 조금 자세히 소개하면 이렇다.
1950년대, 인도네시아 정글에서는 코뮤니스트가 준동하고 지루한 게릴라전이 펼쳐진다. 이들 공산주의자들이 아이를 낳으면, 생존을 위해 전투지역 밖으로 갓난아기를 빼돌린다. 커다란 열대과일 ‘잭푸르트’ 속을 파서는 그 안에 아이를 숨기고 길에 놓아두면, 누군가 착한 주민이 아이를 발견하여 키우는 것이다. 그 아이가 자라서 자유화된 인도네시아에서 살게 되고, 그 사람이 또 자식을 낳아 이 영화의 주인공이 된다. 그 주인공, 이판에게는 공산주의자 아이라는 딱지가 붙었을 터이고 원하는 대학교 진학할 수 없게 되자 대만으로 떠난다. 하지만, 대만에서 이판은 또 다른 차별을 만난다. 대만에서 일하고 있는 필리핀 불법체류자 라일라이다. 이판과 라일라의 이야기와 정글의 기억이 교차되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질문] 베라 첸(陳雪甄)과 공동감독으로 나와 있다. 역할분담은 어떻게 했는지.
[라우 감독] “베라 첸은 이 영화에서 연기도 한다.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 전까지 연기자들에게 연기 지도를 했다. 촬영이 시작되면 내가 온전한 감독이다. 이 영화는 사전에 완벽한 시나리오가 준비되지 않았다. 영화가 상영되고 나서야 배우들은 자신들의 연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출연진이 전문연기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다른 대본을 주고 연습도 시키고, 현장에서 상황에 따라 바꿔가며 촬영을 진행했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도록, 배역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기를 바랐다.”
감독은 이어 베라 첸에 대해서도 덧붙였다. “원래 그녀에게 푸저우 사투리(福州话)를 원했다. 두 달 정도 연습하고 촬영에 들어갔는데, 완벽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사 없는 연기로 바꾸었다. 말레이시아 북부지역엔 푸저어 사투리가 나와야하니깐. 푸저우 말을 할 수 없다면 관객이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고 싶었다.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언어이다. 나에겐 익숙한 말이다.”
[질문] (나처럼) 그 당시 상황을 모른 사람 입장에서는 영화에 보이는 상황이 너무 간단히 서술되는 것 아닌가?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다큐멘터리 <액트 오브 킬링>을 처음 봤을 때처럼 당황스럽기도 하다.
[라우 감독] “인도네시아의 공산세력을 학살한 <액트 오브 킬링>은 부당한 폭력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내 영화도 그렇다. 나는 영화를 통해 역사를 알려주기보다는, 그 때 역사가 지금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말레이시아뿐만 아니라 아시아 나라들은 똑같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세상을 떠나면 제사를 지내잖은가. 영혼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과거가 기억되고 살아가는지 말하고 싶었다. 역사는 멈춘 역사가 아니라, 동시대성이라고 생각한다.”
[질문] 2016년 부산에서 소개된 ‘무단외출’(Absent Without Leave/不即不離)에 이어 이번 영화도 같은 역사적 소재를 담고 있다. 감독은 줄곧 말레이시아의 과거 역사에서 기인한 지금의 문제를 다룬다. 그렇게 매달리는 이유가 있는가.
[라우 감독] “전작 ‘무단외출’은 1950년대 코뮤니스트(공산주의자)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다큐였다. 이번 영화는 말레이시아 중국인의 이야기이다. 소외된 계층이다. 그런데 대만에서 만나는 필리핀 여성도 똑같은 처지이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똑같은 소외계층이 되고 반복된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나쁜 역사인 셈이다. 그래서 역사책에서도 숨겨지는 부분이 있다. 할아버지를 쫓아가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그들이 어떤 커뮤니티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정확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잭푸르트’를 본 말레이시아 관객 중에서는 ‘우리 아버지가 평소 혼이 나간 사람 같았는데 그 이유를 조금 알겠더라’고 내게 말하더라.”
감독은 이런 이야기도 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공산주의자는 전부 중국계라고 말한다. 그렇게 비인간적으로 세뇌당하고 그렇게 배운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이 영화는 상영되지 못할 것이다.”
[질문] 지난달 한국에서 열린 DMZ다큐영화제에서 소개된 ‘도끼는 잊어도 나무는 기억한다’(The Tree Remembers/還有一些樹)도 그 연장선에 있다.
[라우 감독] “그렇다. 나는 작업을 그렇게 하고 있다. 이번 작품은 다큐 ‘무단외출’에서 장편 극영화로 발전시킨 것이다. 두 번째 다큐 ‘...나무는 기억한다’도 곧 장편 극영화로 만들 생각이다. ‘무단외출’은 60년간 그 존재를 몰랐던 할아버지를 추적하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영혼을 찾는 것이다. ‘잭푸르트’에서는 소년이 말레이시아를 떠나고 싶어 하지만, 대만에서 또 다른 말레이시아를 만나게 된다.”
[질문] 감독은 부산영화제와 인연이 깊다.
[라우 감독] 나의 단편 ‘가정부 니아’가 상영되었었다. 대만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필리핀 출신 니아의 이야기다. 니아는 항상 문을 닫고 산다. 물리적 정서적 단절을 이야기했다. (‘가정부 니아’는 2015년 ‘와일드 앵글’섹션에서 상영되어 선재상을 수상했다.)
[질문] 감독 영화는 정작 말레이시아에서는 상영을 못하고 있다.
[라우 감독] “..나무는 기억한다‘도 상영을 할 수 없었다. 아마, 이 작품도 상영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민감한 문제라서. 하지만, 나는 계속 만들 것이다. 내 영화가 상영이 금지되고 나서 온라인(유튜브)에 공개했다. 그게 뉴스가 되고 논쟁이 되었다. 물론, 정부부처는 분노하고 말이다.”
[질문] 제작비 구하기가 쉽지 않겠다.
[라우 감독] “말레이시아에서는 구할 수가 없다. 부산에서 펀딩 받고, 인천에서 펀딩 받고, 대만에서 받고 그런다.” (‘무단외출’은 2015년, 인천다큐멘터리포트에서 ‘다큐 스피릿 어워드’를 수장하며 1500만원의 지원금을 받았고, ‘가정부 니아’가 선재상을 받으며 1000만원의 상금을 받았다)
[질문] 대만에서 활동 중인데. (라우 감독이 대표로 있는 영화사 ‘蜂鳥’(허밍버드/벌새)는 대만 타이베이에 사무실이 있다)
[라우 감독] “대만에서 영화작업을 하지만, 내 영화는 말레이시아 영화이다. 할아버지가 정글에서 게릴라전을 펼쳤다면, 난 지금 영화로 게릴라 전을 펼치는 셈이다. ‘무단외출’도 대만에서는 개봉되었다. 대만 관객들도 말레이시아 역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보편적 이야기이다.”
[질문] 남자주인공 ‘이판’ 역의 배우는 어떻게 캐스팅했나?
[라우 감독] “우니엔센(吳念軒)은 아직 전문배우라 부르기 어렵다. 하이틴로맨스에 조연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영화를 준비할 때 오디션을 많이 봤다.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감독인 내가 프로니까 배우를 굳이 프로로 캐스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빛내줄 매력을 찾는 게 더 좋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생물과 같다. 같이 발전하는 과정이다. 씨앗을 뿌려도 다르게 자라듯이.”
[질문] 여배우(Laila ULAO)는 어떻게 캐스팅했나.
[라우 감독] “필리핀에서 오디션을 보았다. 이슬람이 많이 사는 민다오에서. 그 지역에서 자원봉사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본인의 생각도 뚜렷했다.”
“영화를 찍을 때 두 배우가 병원에서 만나는 장면을 제일 먼저 찍었다. 서로 모른 상태에서 ‘여자친구가 온다. 인사해.’라고. 모르는 상태에서 연기하길 원했다.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이 들도록. 리얼하게. 낯설고 부끄럽고, 그런 감정을 잡아내고 싶었다. 이슬람 배우가 합류하면서 전체 이야기도 많이 바뀌었다. 영화에 나오는 가족사진은 실제 배우 본인의 가족사진이다.“
[질문] 영화제목으로 쓰인 ‘잭푸르트’는 한국에선 볼 수 없는 과일이다. 맛이 어떤가?
[라우 감독] “달고 맛있다. 고향집에서는 자주 먹는다. 가족들하고만 나눠먹기에 친밀감이 있다. 매일 먹는다.”
[질문] 영화에서는 과일 속에다 갓난아이를 숨기고 외부로 반출시킨다. 그렇게 크나?
[라우 감독] “물론. 그런데 그건 내가 상상한 것이다. 그 당시 그런 식으로도 빼돌려지지 않았을까?”
[질문] 감독님은 이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야스민 아흐마드’에게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라우 감독] “말레이시아에는 말레이계, 중국계, 인도계 등 많은 민족이 산다. 그들은 각각의 커뮤니티를 이루고 자신들의 영화, 드라마, 음식만을 고집한다. 야스민 아흐마드 감독은 처음으로 그런 경계를 허물었다. 내가 처음 돈 내고 본 영화가 그의 영화였다. 극장에서 다른 민족이 모여 있는 걸 처음 봤다. ‘SEPET’이란 영화이다. 말레이시아 말로 ‘찢어진 눈을 가진 중국인’을 일컫는다. 차이니스 보이와 말레이 소녀의 사랑이야기이다. 물론 여러 장면이 잘린 채 개봉 되었었다. ‘잭푸르트’는 그 영화에 대한 오마쥬인 셈이다. 차이니스 보이와 필리핀 걸의 사랑이야기. 물론, 무슬림과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지만.”
[질문] 부산영화제와 비슷한 시기에 열리는 밴쿠버영화제에서도 이 영화가 상영된다. 향후 일정은?
[라우 감독] 일정상 밴쿠버엔 못 간다. 대신 유럽에 갈 것이다.
라우 감독은 내달 23일, 대만에서 열리는 금마장 영화시상식에 <잭푸르트>로 신인감독상, <도끼는 잊어도 나무는 기억한다>로 최우수다큐멘터리상 후보에 올랐다.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