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3월 8일은 ‘여성의 날’이다. ‘남성중심의 세상’에 ‘여성’의 실존(實存)을 보여주는 수많은 투쟁과 항거의 결과물이다. 원래가 노동과 사상(특히 사회주의적!)의 눈부신 성과인 ‘여성의 날’은 우리나라에서는 2018년 들어서야 법정기념일로 지정되었다. (양성평등기본법) 오늘 ‘여성의 날’을 맞아 KBS 1TV [독립영화관]에서 아주 특별한 영화가 방송된다. 우리나라 영화사에서 최초의 여성감독으로 기록된 박남옥 감독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 <명색이 아프레걸>(연출:김광보)이다. 여러모로 흥미로운 작품이다. 과연 박남옥 ‘女’감독은 가부장적 사고가 횡행하는 대한민국에서, 그리고 그 어디보다도 남성우월주의 문화가 판치는 영화판에서 어떻게 영화감독이 되었고, 어떻게 장렬히 산화했는지 보여준다.
오늘 독립영화관에서 방송되는 <명색이 아프레걸>은 영화는 아니다. 무대 공연을 영상으로 옮긴, 요즘말로는 박제한 작품이다. <명색이 아프레걸>은 지난 2021년, 코로나가 한창일 때 국립극장에서 공연된 작품으로, 국립극장의 3개 전속단체인 국립창극단·국립무용단·국립국악관현악단이 참여하여 완성된 작품이다.
먼저 제목에서 사용된 ‘아프레걸’(après-girl)은 불어 ‘Apre-guerre’에서 따온 한국식(!) 조어이다. 1950년대의 사회상을 이야기할 때 ‘자유부인’과 함께 중요한 의미를 지닌 단어이다. 원래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대상을 말하는 ‘전후’(戰後)에 ‘여성’의 위상,생존방식을 나타내는 신조어로 쓰였다. 해방이 되고, 미군이 들어오고, 전쟁이 일어나고, 전쟁 ‘미망인’이 넘쳐나던 시절,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한국의 여성’은 어떤 모습을 띄었을까. <명색이 아프레걸>은 바로 그 시절, 한국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인 박남옥의 삶을 통해 알아본다.
박남옥는 1923년, 경상북도 하양(지금의 경산)에서 태어났다. 작품은 박남옥의 삶을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투포환 선수로 신기록을 세웠고, 그 시절 스크린의 꽃이었던 여배우 김신재의 열렬한 팬이었던 학창시절, 그 영향으로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열정으로 가득했던 세월이 국립극장 공연을 통해 재연된다. 그런 영화에 대한 열망이 남달랐던 박남옥은 결국 남편의 시나리오로 직접 첫 번째 영화 <미망인>을 찍기 시작한다. 물론,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 시절엔 그 누구도 ‘여자’감독에게 제작비를 대주지 않았다. 영화는 촬영과 중단, 속개가 계속된다. 편집과정에서는 ‘여자가 편집실에 오면 재수가 없다’는 이야기도 듣게 된다. 널리 알려졌듯이 당시 박남옥 감독은 갓 태어난 아기를 등에 업은 채 촬영을 했고,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배우와 스태프를 위해 밥까지 직접 해가며 작품 완성에 매달린다.
<미망인>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 혼자가 된 주인공 ‘신’의 홀로서기를 담고 있다. 보통의 한국영화라면 ‘정절(貞節)과 지조의 여성으로, 억센 모성애로 하나뿐인 딸을 잘 키우는 여인상’을 그리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연애도 하고, 딸도 남의 손에 맡기는 파격적 ‘신 여성’상을 보여준다. 영화 흥행? 어렵게 극장에 내걸렸지만 사흘 만에 간판을 내리고, 지방흥행도 망한다. 그리고 박남옥은 죽을 때까지 두 번째 감독의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이 영화는 1997년, 동숭아트센터에서 열린 제1회 서울여성영화제‘(2008년 10회부터 타이틀에 ’국제‘를 붙였다!) 개막작으로 발굴, 상영되었다. 마지막 10분 분량은 오디오가 유실된 채.
오늘 방송되는 <명색이 아프레걸>은 2021년 12월 30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공연실황을 담고 있다. 박남옥 감독의 치열했던 삶을 한국 현대사의 굴곡과 함께 파란만장하게 펼쳐진다. 일반 극영화나 뮤지컬과는 또 다른 감상의 묘미가 있다.
<명색이 아프레걸>은 박남옥 역을 맡은 이소연을 비롯해 김지숙(김신재), 김미진(이민자), 김수인(이택균), 이광복(김영준), 조유아(방영자), 이연주, 민은경, 유태평양, 조영규 등 국립창극단 배우들과 장현수, 노문선, 이세범, 조수정 등 국립무용단 무용수가 무대에 오르고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연주를 맡았다.
궁금해서 ’여성의 날‘ 관련 법(양성평등 기본법) 조문을 보니, 3월 8일은 법정기념일인 '여성의 날'로 지정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인권선언문이 발표된 날인 9월 1일은 ’여권통문(女權通文)의 날‘로 지정했단다. 박남옥 감독은 2017년 미국에서 별세했다. 향년 94세. 그리고 어제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2023년 한국 영화 성인지 결산>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개봉한 고예산(순제작비 30억원 이상) 한국 상업영화 35편 중 여성 감독은 단 한 명, 임순례 감독(교섭) 뿐이었단다.
참, 이 영화는 코로나가 한창 기승을 부리자 멀티플렉스들이 온갖 자구책을 찾을 때 극장에서 상영되었다. 국립극장의 명품 창극 공연을 대형 스크린으로 감상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국립극장-창극 기획전’의 일환으로 롯데시네마 일부관에서 이 작품이 공개되었다. 물론, 관객동원은 서글펐지만 말이다. 그리고, 한국영상자료원 유튜브에서는 박남옥 감독의 오리지널 <미망인>(1955)을 볼 수 있다. 마지막 10분은 사운드가 없다. 그래서 더욱 비장하고, 미스터리하게 작품이 다가온다.
▶명색이 아프레걸 ▶감독: 김광보 ▶각본: 고연옥 ▶출연 : 이소연, 김지숙, 김미진, 김수인, 이광복, 조유아, 이연주, 민은경, 유태평양, 조영규 ▶작/편곡/음악감독/지휘 : 나실인 ▶ 안무 : 이경은 ▶제작: 문화체육관광부 국립극장 ▶극장개봉:2022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