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도 안 되는 대한민국의 역사는 그야말로 파란만장했고 다이나믹했다. 이 땅에 사는 사람은 모두 역사를 만들어가는 당사자이다. 물론, 역사를 승리로 이끈 선구자도 있었고, 일방적인피해자도 있었으며, 가해자와 방관자도 섞여 있다. 우리는 모두 그들의 유족이며, 후손이다.
99년 전, 1920년. 우리 땅이 아닌 국경 너머 중국 땅에서 ‘봉오동 전투’가 벌어졌다.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총을 든 독립군들이 추격해오는 일본군을 박살낸 역사적 사건이다. 190억 원이라는 엄청난 제작비로 그날의 승리를 담은 <봉오동 전투>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영화에서는 유해진, 류준열, 조우진 등이 열연한 이름 모를 전사들이 일본군과 싸우며 피를 흘린다. 영화 막판에는 홍범도 장군이 등장한다.
자, 봉오동 전투가 끝난 뒤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는 봉오동 골짜기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운 독립군이 다음 전투를 위해 의기충천한 모습을 보여준다. 몇 달 뒤 이들의 행보는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대첩’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간도의 독립군들은 소련 땅으로 넘어갔고, 이른바 ‘자유시 참변’으로 이어졌다.
최민식이 연기했던 카리스마 넘치는 홍범도 장군은 러시아 적군파 소속이 되어 일본군과 싸운다. 암살위기와 밀정에 시달렸고, 스탈린이 정권을 잡자 다른 ‘고려인’들처럼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동을 당한다. 그곳에서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쓸쓸히 삶을 마감한다.
봉오동전투 당시 이 일대에는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部)라는 독립군연합부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연합부대의 부장(府長)은 최진동(崔振東)이었고, 부관이 안무(安武), 북로 제1군사령부 부장(部長)이 홍범도(洪範圖)였다. 최진동 장군은 조국 땅을 떠나 중국 봉오동에 터를 잡은 대지주였고 독립군을 만들어 무장항일 투쟁을 펼쳤다. 그 업적으로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하지만 훗날의 사가들은 최진동의 또 다른 모습을 찾아낸다. 만주사변이후 변절했다는 것이다. (전 재산을 털어 무장독립투쟁을 이끌던 그가 어떻게 변절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봉오동전투’를 지휘한 홍범도와 최진동은 그렇다 치고, 유해진이, 류준열이, 조우진이, 최유화가, 성유빈이 연기한 그 독립군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에게 피붙이 후손이 있었다면 그들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행복하게, 품위 있게 잘 살고 있을까. 다들 짐작할 것이다. 독립투사의 후손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일본군의 잔학성을 기억하라
영화를 보는 관객은 일단 독립군이 사악한 일본군을 처단하는 것에 쾌재를 내지를 것이다. 디테일한 점에서 조금 다르면 어떤가. 영화 ‘봉오동 전투’의 전체적 맥락은 극일을 위한 ‘시청각적 교재’이니 말이다.
<봉오동 전투>가 공개되면서, 일본군의 잔학성에 대한 상투적인, 혹은 과도한 표현에 대해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나오는 대목을 소개한다.
“아아! 세계 민족 중에서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친 자 수없이 많지만 어찌 우리 겨레처럼 남녀 노유가 참혹하게 도살을 당한 자 있을 것이리오. 저 왜적이 우리 서·북간도의 양민 동포를 학살한 일 같은 것이야 어찌 역사상에 일찍이 있은 일이겠는가. 각처 촌락의 인가·교회·학교 및 양곡 수만 석을 모두 불태우고 남녀 노유를 총으로 죽이고, 칼로 죽이고, 매질하여 죽이고, 결박하여 죽이고, 주먹으로 때려죽이고, 발로 차서 죽이고, 찢어 죽이고, 생매장하고, 불에 태우고, 가마에 삶고, 해부하고, 코를 꿰고, 옆구리를 뚫고, 배를 가르고, 머리를 베고, 눈을 파내고, 가죽을 베끼고, 허리를 베이고, 사지를 못 박고, 수족을 잘라서 인류로서는 차마 볼 수 없는 일을 저들은 오락으로 삼아 하였다. 우리 동포가 혹은 조손이 함께 죽고, 부자가 함께 참륙당하고, 혹은 남편을 죽여 아내에게 보이며, 혹은 형을 베어 아우에게 보이며, 혹은 산모가 기저귀에 싼 어린애를 품고 화를 피하다가 모자가 같이 명을 끊었다. 그 밖에 허다한 일을 종이에 다 적을 수 없으며 우리와 호양 각처의 조사 보고도 그 참상을 다 말할 수 없었다.
이전에 일제강점기를 다룬 북한 영상물을 보니 이런 장면도 있었다. 일본군이 총검으로 갓난아기를 푹 찔러 불구덩이로 던져 버리는 것이다. 일본군의 잔학성은 상상을 초월한다. 30만 명의 중국 양민을 학살했던 남경(난징)대학살 때 일본군이 벌인 잔혹한 도살극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노다 츠요시와 무카이 토시아키는 중국인의 목을 베는 ‘백인 참수경쟁’을 벌였다. 일본도로 누가 더 많은 사람의 목을 베는가를 시합한 것이다.
언젠가는 ‘아베의 화이트 소동’도 잦아지고, 위안부 할머니의 존재도 망각할 것이고, 독도의 파고도 잔잔해질 것이다. 그러면서 ‘봉오동 전투’란 배우들의 필모그라피로만 기억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일본이 과거에 그랬다는 사실, 그러한 역사를 잊는 순간 그 민족은 정말 가망 없다는 사실이다.
영화 <봉오동전투>에서 보여준 애국적 열정이 들끓는 비주얼만이라도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있기를. 그게 이 영화의 미덕인지도 모른다.
참, 일본배우 다이고 코타로가 연기한 소년병의 이름이 왜 ‘유키오’일까. 원신연 감독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를 생각한 것일까. 일본 식자층, 지식인의 우익성향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장치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