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굼벵이에게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라는 말이 있다. 대학 졸업한 지가 언제인데 여전히 백수 신세인 용남(조정석)에게는 과연 어떤 재주가 있고, 어떤 상황에서 그 신기(神技)가 발휘될까. 지난주 개봉되어 전광석화같이 3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엑시트>의 관람 포인트이다.
영화 <엑시트>는 재난영화의 탈을 선 신기한 영화이다. ‘센트럴역’이 등장하고 ‘국제신도시’라는 타이틀을 단 가상의 도시에 초대형 재난이 발생한다. 영화 전개상 전혀 중요하지 않지만,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특허권 문제로 밀려난 한 화학자가 화학공장(앤서화학) 본사 앞에 초대형 트럭을 갖다 대고 고압가스의 밸브를 열어젖힌다. 순식간에 도심은 하얀 가스가 퍼지기 시작한다. 맹독성이다. 사람들이 픽픽 쓰러지고, 살아남기 위해 건물 위,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이 도시 한 이벤트홀에서는 칠순 어머니(고두심)를 위한 잔치를 벌이는 사람들이 있다. 사람들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한다. 그 식당의 부점장 의주(임윤아)가 신속하게 사람들을 옥상으로 대피시키기 시작한다. 아래로부터 유독가스는 스멀스멀 올라오고, 구조 헬기는 올 생각을 않는다. 이때 굼벵이의 활약이 시작된다. 백수 용남은 대학시절 산악부 에이스였단다. 그리고 운명의 장난인지 의주를 그곳에서 만난 것이다. 용남과 의주는 이제 퍼지는 유독가스를 뚫고, 도심지를 활공, 아니 활주하기 시작한다.
<엑시트>은 재난영화의 구조를 영리하게 이용한다. 불타는 고층빌딩의 재난극의 이유는 당연히 설계부실과 행정당국의 비리쯤은 기본일 테다. <엑시트>는 그런 정치적 설정 대신 “왜, 이 동네는 옥상문을 다 잠가 두는 거야!”같은 실질적인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재난의 현장에 항상 등장하는 이기적인 사람(점장)을 등장시켜 분노에 기름을 끼얹는다.
영화는 존 맥클레인(다이하드 형사)같은 사람이나, 앤드류스(타이타닉의 설계자) 같은 사람 없이, 우리 주위의 평범한 사람이 펼치는 히어로물이다. 부점장이라는 타이틀과는 달리 힘든 직장생활을 꿋꿋하게 이겨내는 의주나, 조카에게까지 무시당하는 백수 청년이 의도치 않은 상황에서, 등 떠밀리다시피 타인의 생명과 운명을 책임지는 극한 도전에 나서는 것이다.
영화에서 사용된 드론의 활용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스파이더맨 커밍홈’보다 효과적인 것 같고, 당연히 현실적인 것 같다.
<엑시트>는 그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가족의 소중함과 가족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중함을 느끼게 한다.
조정석과 임윤아의 콤비플레이는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평범한 히어로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한다. 그리고, 이 뜻밖의 재난극에 합류한 조정석 일가친지 구성원 모두가 완벽한 재난극을 풍성하게 만드는 조연의 역할을 수행한다.
<엑시트>에서는 웃다가, 혹시 눈물짓는 장면을 만날지 모른다. 고결한 희생의 순간은 별안간 뜻밖에 찾아오니까. 용남이나 의주처럼,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인류를 구한 한방’이 있을지 모른다. <엑시트>는 그런 희망을 심어주는 2019년 한국영화의 신기원이다.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