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순례 감독은 <와이키키 브라더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리틀 포레스트> 등을 감독한 대한민국 ‘여성’ 감독이다. 굳이 ‘여성’ 감독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만큼 그가 한국 영화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기 때문이다. 한양대를 나와 프랑스에서 영화를 공부한 그는 여균동 감독의 <세상 밖으로>의 조감독을 거쳐 현장에 뛰어든다. 그가 발표한 첫 영화는 단편 <우중산책>이다. 런닝 타임 13분의 이 영화는 그 해 열린 제1회 서울단편영화제에서 우수상을 수상한다.
기사를 찾아보면 이 영화를 두고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의심할 바 없는 ‘올해의 주목할 만한 시선’이다. 혜성처럼 나타났으며, 말 그대로 일시에 충무로의 신인감독들을 ‘낡은 물결’로 몰아치듯이 축제를 통해 여왕으로 군림했다”라며 “임순례 영화는 충무로 영화의 방부제 이상이다. 바로 여기서부터 행복하게 전진할 것”이라고 격찬했다. 바로 그 영화 <우중산책이 오늘 밤 KBS 1TV <독립영화관>에서 방송된다.
<우중산책>은 서울 변두리의 소극장을 배경으로 한다. 멀티플렉스 시대에 만나는 1994년의 서울 소극장은 마치 타임머신이라도 탄 듯하다. 당시에는 그런 극장이 많았다. ‘개봉관-재개봉관-재재개봉관’이라는 상영방식과 함께, 영상문화의 범람은 ‘B급 스타일’의 영화가 이런 아기자기한 소극장에서 상영되었다. 여주인공 강정자는 변두리 작은 극장(뉴화양 소극장이란다!)의 매표직원이다. 무더운 여름날, 극장에서는 그저 그런 영화가 상영되고 있고, 로비에는 그렇고 그런 사람이 앉아있거나 지나간다. 무료하게 앉아있는 정자 씨는 오늘 한껏 단장했다. 오늘 선을 보기로 했단다. 어떤 남자가 나타날지 궁금해진다. 극장 안 풍경은 아마도 어제와 똑같을 것이다. 한바탕 비가 쏟아진다. 한 남자가 나간다. 저 남자일까. 정자 씨는 밖으로 뛰어나간다. 비를 쫄딱 맞고. 수확없이 돌아오니, 극장 로비에 누군가가 있다. “그 남자!”
임순례 감독의 영화는 승자의 화려함보다는 패자의 우중충함이 화면을 지배한다. 물론, 그 사람이 절망적이지는 않다. 소극장 매표소 정자씨도, 영사실의 남자(명계남)도, 로비 소파에 죽치고 있는 사람도, 녹즙기 외판원까지. 등장하는 인물은 하나같이 후텁지근한 날씨에 상영하는 영화보다는 선풍기 바람에 더 기댄다. 그들에게도 꿈은 있을까. 이 판에 박힌 듯한 여름날의 풍경을 타파할 소낙비 같은 탈출구는 있을까. 임순례 감독은 13분의 단편을 통해 강정자씨의 꿈과 소극장의 풍광을 오밀조밀하게 담아낸다.
오늘밤 KBS <독립영화관> 시간에는 임순례 감독의 <우중산책>과 함께 김일란 감독의 다큐멘터리 <아름다운 생존>을 방송한다. 이 작품은 작년 가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마련한 ‘아름다운 생존: 한국여성영화감독 박남옥, 홍은원, 최은희, 황혜미, 이미례, 임순례’ 전시회 때 공개된 다큐이다. 박남옥은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감독’이다. 그가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딸을 등에 업고 메가폰을 잡은 작품은 <미망인>(1955)이란 작품이다. 신상옥 감독의 일생의 동반자 최은희도 <민며느리> 등 몇 편의 작품을 감독했다. 한국영화 100년사에 수많은 영화인이 명멸했지만 ‘여배우’ 말고 ‘여감독’은 몇 명이나 기억할까. 오늘밤 <독립영화관>에서 그들을 만난다.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