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한 역사를 가졌더래도 근현대적 개념의 국가로 거듭난 경우, 대부분의 나라에서 '건국의 주역', '나라의 아버지'(國父)가 있다. 미국의 조지 워싱턴, 중국의 손문, 튀르키에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처럼. 우리나라는? 물론, 오랜 봉건주의, 세습 왕조의 고리를 끊어내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 국가의 수립을 어느 한 사람의 힘으로 완수되었다고 재단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1945년, 1948년, 그리고 1950년을 거치며 국토는 둘로 쪼개지고, 정권은 여러 차례 바뀐다. 그에 따라 역사의 출발점에 대한 견해, 의견, 판단이 제각각이다. 그런 시점에 역사적 안목을 키워줄 영화가 한 편 극장에 공개되었다. 지난 1일(수) 개봉된 김덕영 감독의 <건국전쟁>이다.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이승만을 '당당히' 내세운 다큐멘터리이다.
이승만은 누구나 안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외교적 능력이 출중한 정치인으로 건국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대한민국을 세운 초대 대통령이라고. 한국전쟁 당시 미군을 붙들어 맨 외교술을 보여주었고, 이후 독재자였고, 부정선거의 원흉이며, 도망가듯 하와이로 떠난 뒤 그곳에서 눈을 감았다고. 보통 이렇게 이해된다. 물론 이것은 역사적 진실과 누군가의 판단이 뒤섞인 접근이다. 김덕영 감독의 <건국전쟁>은 그런 허상과 허구, 거짓의 장막을 벗겨보려고 애쓴다.
이승만은 1875년 ‘조선’에서 태어났다. 조선의 백성이었고, 일제 식민지의 피지배자였다. 미국 유학을 떠난 뒤 미국에서 한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인물이다. 그는 평생 외교, 교육, 언론으로 독립운동을 했다. 해방 후에는 한반도 운명의 그랜드 디자이너였으며, 전쟁 이후 대한민국의 안전망을 세팅한 인물이다.
영화는 류석춘 교수, 송재윤 교수(캐나다 맥매스터대)처럼 널리 알려진 학자가 나와 잘못 알려진 이승만의 과(過)에 대해 하나씩 평반(平反)한다. 영화를 보고 나서야 몇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미국에서 공부한 이승만은 신생 국가의 미래의 기초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육정책, 여성정책, 원자력정책 등, 당시 상황에서 보자면 탁월한 안목이라 아니할 수 없다. 무상교육 실시로 문맹률을 획기적으로 끌어내렸고, 그 누구보다도 먼저 여성 참정권의 중요성을 인식했으며, 일찌감치 원자력 인재양성을 위해 미국에 국비유학생을 보냈다고 하니 그것만으로도 한국인의 인식체계를 반세기는 끌어올린 셈이다.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바로잡는다. 어떤 내용인지는 극장에서 확인하기 바란다. 끝까지 이승만을 악의 축으로 보는 사람에게는 통하지 않을 이야기들일 테니.
이승만의 공과를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아카데믹한 일일 것이다. 서울올림픽 전후하여, 보수적인 ‘한국근현대사’ 부분에 바람을 불러일으킨 것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관련 서적’, 서대숙 교수의 ‘김일성論’ 그리고, 유영익 교수가 헌신한 ‘이승만 연구’였다. 숭배하거나 비난하거나, 우상이거나 적이 되어버리는 해방공간의 비뚤어진 역사인식을 조금이나마 바꾼 학계의 용기일 것이다. 이제, 진보주의, 개혁주의가 득세한 문화(영화)판에도 때늦은 용자가 나타난 셈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신생독립국가의 리더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물론 반만년 역사를 가진 한국이지만 근대적 개념의 국가에서는 국제적 감각, 외교술이 중요했을 것이다. 누구나 아는 지정학적 요소, 당시의 이데올로기의 지형도 보자면 더욱 그렇다. 아시아, 아프리카의 수많은 신생독립국가가 생겼을 때 ‘앙상 레짐’이 무너진 뒤 어디선가 준비된 듯한 정치지도자가 등장한다. 보통 미국과 프랑스에서 공부한 인사들이다. 그들은 때로는 미꾸라지 같은 유연한 외교술로, 화약고 위에 앉아, 복잡한 정파적 이해관계를 해결하고, 전근대적 문제를 해결하며 신생독립국가의 기반을 다진다. 그 과정에서 불복종과 반역, 충돌, 내전이 생기기도 한다. 잘 되면 창업 다음의 성장, 번영의 단계로 넘어갈 수도 있고, 흑화되어 독재의 고속도로를 닦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승만은 불안한 정치적 지형, 위험한 이데올로기 전쟁의 한 복판에서, 덜 교육받고, 근대적 관습이 여전히 남은 국민들과 함께 ‘대한민국’을 우뚝 세우려고 발버둥친 노(老)정객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당시 국민이 배척한 것이지만. (당시) 대한민국의 운명이 필리핀으로 가든지, 아프가니스탄으로 가든지, 이스라엘로 가든지, 결국 한 지도자의 혜안과 국민의 의지가 선하게 결합되어야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건국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인 셈이다. 꽤 오랫동안 말이다.
▶건국전쟁 ▶감독:김덕영 ▶제작/배급:다큐스토리 ▶개봉:2024년 2월1일/12세이상관람가/10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