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부터 최신작 <기생충>까지 봉준호 감독은 한국사회의 민낯, 특히 계급적 사회모순을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런 봉 감독의 시각을 진작에 볼 수 있었던 작품이 있다. 1994년에 찍은 단편영화 <지리멸렬>이다. 봉 감독의 칸 황금종려상 수상에 맞춰 KBS <독립영화관>이 특별/긴급 편성한 작품이다. (금요일에서 토요일 넘어간) 1일 00시 55분에 1TV를 통해 시청자를 찾는다.
연세대 사회학과를 나온 봉준호 감독은 일찌감치 영화감독을 꿈꾼다. 신촌에서 ‘씨네필’로 영화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키우던 그는 졸업과 함께 한국영화아카데미에 들어간다. 1년 과정의 이곳에 들어간 그는 열심히 영화를 배운다. 이때 찍은 작품이 바로 전설적 작품 <지리멸렬>이다.
<지리멸렬>은 독창적인 구성의 옴니버스 형식이다. 세 편의 각기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고, 각 편의 주인공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함께 토론하는’ 에필로그로 대미를 장식한다. 전체적으로 한국사회의 고질적 병폐(라고 생각한) 권위주의의 몰락을 다룬다. 너무 거창한 것 같지만 봉 감독은 재밌게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첫 번째 에피소드(‘바퀴벌레’)에서는 근엄한 교수님의 일탈이다. 연구실에서 성인잡지(봉감독은 인터뷰에서 줄곧 ‘도색잡지’라고 표현했다. ‘펜트하우스’다)를 뒤적이는 교수님의 행각이 들통 나기 일보직전까지 아슬아슬한 추적극을 보여준다. 두 번째 에피소드(‘골목 밖으로’)는 새벽마다 동네골목을 조깅하면서 남의 집 대문 앞에 놓인 우유를 훔쳐 먹는 어르신네를 보여준다. 깜짝 놀랄 이 사람의 정체는 에필로그에서 밝혀진다. 세 번째 에피소드(‘고통의 밤’)는 접대 술을 거나하게 얻어먹고, 낯선 동네에서 깬 검사님의 배가 살살 아파오면서 벌어지는 코믹극이다. 그리고 대망의 ‘에필로그’에서는 그 교수, 그 어르신, 그 검사님이 ‘TV심야토론’의 패널로 나와 근엄하게 한국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장광설을 푼다.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는 어느 해인가 졸업생들의 단편을 모아 DVD로 출시한 적이 있다. 봉준호 감독의 코멘터리가 수록되어 있다. ‘넷플릭스에서 모셔가고’, ‘칸이 황금종려상이 바친’ 거장 봉준호의 파릇파릇 단편영화 찍기의 고생담을 엿들을 수 있다.
자신의 모교 캠퍼스와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도 찍었다면서, 여건상 다른 ‘충무로’영화 세트장에서도 몰래 찍었다는 이야기를 담담히 털어놓는다. 몇몇 장면에 대해서는 “아이고, 잘못된 커트 연결입니다. 아무리 학생 때라지만 부끄럽네요.”라고 말하기도.
학생 때라 저작권에 대해 별 생각 없이 음악을 집어넣었다고 한다. 마지막에 이병우의 기타 연주곡 ‘자전거’를 꼭 넣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세월이 흐른 뒤 <괴물>에서 이병우 음악감독을 만나 함께 작업한다.
봉준호 감독은 당시 ‘참 짜증나는 TV토론’을 보다가 이런 영화를 생각했단다. 권위적 패널을 보면서 그들에게 평소 어떤 조잡한 면이 있을까 생각했다고. 단순히 세 가지 에피소드를 나열했다면 조잡한 느낌이었을 테지만 마지막에 한군데 묶으면서 화룡점정을 이룬 셈이다.
학생들의 실습작품이니 캐스팅도 현실적이다. 하지만 김뢰하는 이후 봉 감독 영화에 여러 편 출연한다. 에피소드2에 등장하는 아주머니는 박재동 화백의 부인 김선화이고, 에피소드1의 강의실에서 뒷모습만 보이는 빨간 점퍼 남자는 장준환 감독이란다. 영화아카데미 동기였다.
실습작품에서부터 ‘한국사회의 문제’라는 거창한 담론을 담기 시작한 봉준호 감독의 <지리멸렬>은 지금 봐도 썩 훌륭한 작품이다. 칸 황금종려상의 싹수가 보이는 작품이다. 에헴~.
참, 이번 주 <독립영화관>에서는 봉준호 감독의 <지리멸렬>과 함께 박찬욱 감독의 단편 <심판>도 함께 방송한다. 박찬욱 감독은 2004년 <올드보이>로 칸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었다.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