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5일) 밤 11시 30분에 방송되는 KBS 1TV [독립영화관]에서는 다음 주 개봉되는 영화 <이어지는 땅>의 조희영 감독이 연출한 세 편의 단편영화를 만나는 특별한 시간이 마련되었다. ‘독립영화’를 대중에게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해온 [독립영화관]이 기획한 센스 있는 프로그래밍이라고 아니할 수 없겠다. 오늘 방송되는 단편은 <기억 아래로의 기억>(2018), <두 개의 물과 한 개의 라이터>(2020), 그리고 <주인들>(2022)이다. 묘하게도 3편의 영화는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 ‘기억’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그 일이,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그 물건에 대한 오해나 착오, 미련에 대한 소소하면서도 인상적인 접근이다. 3편 다 재밌다!
■ <주인들> “그 가방은 내 것이다” 공민정, 김소령, 정회린 (19분)
숲 속 벤치에 한 사람이 등을 지고 누워있다. 그리고 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 민정과 소령의 모습이 보인다. 둘은 최근에 헤어진 애인에 대해 이야기한다. 각자의 추억을 간직했을 물건들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이야기한다. “버리고 나면 편해?” “버리기 귀찮아서...”. 둘은 강원도로 보살님에게 점을 보러 가는 길에 벤치에 놓인 가방 하나를 보게 된다. ‘누가 버리고 간 것인가?’하며 민정은 그 가방을 집어 든다. 그런데, 한 여자가 그 가방이 자기 것이라고 말한다. 조금은 의심스러웠지만 가방을 건네주고 세 사람은 함께 케이블카를 타고 산을 오른다. 어느새 그 여자는 사라진다. 그리곤 한 남자가 ‘이 가방, 놔두고 가셨어요’라며 그 가방을 전해준다. 둘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저 멀리 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는 게 보인다.
영화는 짧지만 상당히 인상적이다. 헤어진 사람의 물건을 내다버리면 그 사람을 잊는 것인가. 추억이 담긴 애틋한 이야기를 할 듯 하다. 가방 주인이라고 우기던(!) 그 여자는 환자복을 입고 있었다. 정신병원에서 나온 것인가? 이 영화의 첫 장면을 이랬다. 벤치에 누워있는 그 여자였고, 그 여자는 그 가방을 베고 누워있었다. 그리고 책을 읽다가, ‘오다가 고양이를 보았어.’라는 대사를 나눈다. 어딘가 홀린 것인가. 감독은 가방을 이야기하는지, 옛 추억을 이야기하는지, 아니면 기억의 한계를 테스트하는 것인지. 그러면서 ‘사물의 주인’의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본다. 간절히 원하면 얻는다는 게 가방인지, 추억인지, 그 사람인지.
■ <두 개의 물과 한 개의 라이터>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이 그 사람 맞아?” 공민정, 문혜인 (29분)
잠에서 깬 지원(공민정)이 뒷산으로 산책을 나간다. 상쾌하다. 그런데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황급히 달아난다. 그런데 얼마 뒤 산 정상에서 마주친다. 혜영(문혜인)이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것 같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둘 사이의 관계를 알게 된다. 학교 선후배이며, 같은 남자(영광)를 차례로 사귀었다는 것을. ‘전’ 애인, ‘전전’ 애인의 만남이다. 둘은 어색하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런데, 그 남자, ‘영광’에 대해 기억하는 게 조금씩 다른 것 같다. “빵 싫어했다고? 너무 좋아했는데” 식으로. 그러다가, ‘영광’을 사귄 시점 때문에 파열음이 생긴다. 둘은 다 마신 생수병을 쓰레기통에 넣고, 길에서 주운 라이터로 담배에 불을 붙인다.
같은 남자를 사랑했던 두 여자가 만나서. 이미 과거가 된 그 남자를 이야기할 때 무슨 이야기를 할까. 어떤 순간들을 기억하고 있을까. 영화는 단순한 상황에서 흥미로운 지점을 끌어낸다. 아마도 젊은 시절, 열정적으로 사랑했을 존재를 떠올리며 ‘제3자의 존재’에 대해 언짢은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의 힘인지, 기억의 오류인지 사람은 또 의외로 과거지사에 발목 잡히지 않는다. 제목은 문학적이면서도 실용적이다. 물을 다 마셨으면 빈 병은 분리수거하고, 담배 하나 다 태울 즈음이면 세상 번뇌 다 잊어버릴 것이니. 영화 내용도 함께 말이다.
■ <기억 아래로의 기억> “그거 내가 준 적 없는데...” 김예은, 하성국, 문예인 (23분)
유경(김예은)이 캐리어를 끌고 지하철을 나선다. 잠시 귀국한 것이다. 언니 집에서 자기 짐을 정리하다가 비닐팩에 모아둔 담뱃갑 종이를 발견한다. ‘이게 뭐지?’ 오랜 친구 성현을 만나 혹시 이것 본 적 있는지 물어보지만 모르겠단다. 그러다가 석영이 수집품일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석영은 유경의 헤어진 애인. 어색하지만, 궁금해서. 혹은 꼭 돌려줘야할 것 같아서 성현의 집에서 석영을 만난다. 그런데, 자기 것이 아니란다. 이런 것 준 적이 없단다. 유경은 어쩔 수 없이 성현에게 건네고 나선다. 성현은 밖에 비 온다며 우산을 건네준다. “이 우산 어디서 난 것인지도 몰라”라며. 그런데 그새 비가 그친 모양이다. 유경은 우산을 들고, 털레털레 걸어간다.
오래된 짐을 정리하다가 갑자기 나온 사진 한 장, 기념품 하나에 잠깐 추억에 잠기게 된다. 그런데, 도대체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이 이상한 물건은 언제 어디서 난 것일까. 어쩌면 인연의 끈일까, 아니면 잊고 싶지 않은 추억의 실마리일까. 어쩌면 말입니다. 다시 그 사람을 만나고 싶은 ‘저 기억 밑바닥의 잠재심리’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결론은 흥미롭다. 그것이 아니란다. 조희영 감독의 이 짧은 이야기의 대반전은 우산에 있다. 친구는 자신이 언제,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모르는 우산을 무심코 전해준다. 유경은 세월이 한참 지나 신발장 구석에 처박혀 있는 우산을 발견하고는 ‘이 우산은 뭐지?’하며 또 서울을 헤맬지 모른다. 기억은 또렷한 것 같으면서도 흐릿하고, 흐릿한 것 같으면서도 그 때 같이 있었던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조희영 감독의 단편을 보고 있으면 10일 개봉하는 영화 <이어지는 땅>이 궁금해진다. 우연히 주운 캠코더 속 인물에 대한 ‘이어지는 이야기란다. 조희영 감독 작품을 보면 홍상수 스타일의 소소한 스타일과 에릭 로메르의 따사로운 일상을 느끼게 될 것이다.
참, 공민정 배우는 '주인들'과 '두 개의 물과 한 개의 라이터' 두 편에서 만나볼 수 있다. 신작 <이어지는 땅>에도 출연한다. 오동민 배우는 '기억 아래로의 기억'에서 취객으로 깜짝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