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 엄청난 비극의 시발점이 바로 자기였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죄책감과 상실감은 쉽게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 영어교재에서 읽은 단편소설 하나가 생각난다. 아마 세계대전에서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노부부의 이야기일 것이다.
아들의 전사통지서를 받아든 나이든 아버지는 한동안 멍한 상태로 세월을 보낸다. 그 아이를 얼마나 사랑했었는데. 이제 내 곁에 없다는 사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흐른다. 편지지를 꺼내 글을 쓰기 시작한다. 하얀 종이에. 잉크병에 펜촉을 담근다.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하나. 그때 어디선가 파리 한 마리가 날아온다. 웽웽거리며 맴돌더니 잉크병 모서리에 앉아 위태롭게 붙어있다. 그러다가 잉크병에 빠진다. 시커먼 먹물을 뒤집어 쓴 파리는 필사적으로 잉크병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점점 검은 심연으로 빠져든다. 오르고 오르고 또 오르다 미끄러진다. 할아버지는 가만히 지켜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마침내 파리는 병 밖으로 나온다. 잉크를 잔득 묻힌 채. 할아버지는 그것을 지켜본다.
이야기는 저것으로 끝난다. 이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는 데는 한참이나 시간이 걸렸다. 여기 그런 영화가 있다. 임승현 감독의 <물비늘>이다. '물비늘'은 잔잔한 물결이 햇살 따위에 비치는 모양을 이르는 말이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어 호평을 받았던 작품인데 오늘(6일) 개봉한다. 영화는 손녀를 사고로 잃은 할머니의 이야기이다. 할머니의 심정으로 이 영화를 보자.
이끼가 잔뜩 낀 돌들이 보이는 강물.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면 강물은 흘러가고 있다. 어디선가 삑삑대는 소리가 난다. 예분(김자영)은 헤드셋을 쓰고, 금속탐지기를 들고 계속해서 강바닥을 뒤적이고 있다. 무언가를 애타게 찾고 있다. 물 흐르는 소리와 귀를 거슬리는 기계음만 화면을 채운다. 예분은 1년 동안 이곳 강바닥을 헤매고 있다. 관객들은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예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된다. 술이 엄청 취한 그날. 데리고 있던 손녀 수정에게 모진 말을 퍼붓는다. 집을 나간 수정은 제일 친한 친구 지윤(홍예서)과 래프팅을 타려 간다. 그리고, 그날 사고가 난 것이다. 손녀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고, 그날부터 예분은 삶은 무너지고 강바닥을 뒤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비극의 강물에 지윤이 들어온다. 말하지 못하는 그날의 일. 예분은 딸 현경(김현정)을 볼 면목이 없다.
영화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공간에서 진행된다. 예분은 장례식장을 운영하고 있다. 강가에 있어서 그런지, 익사자가 많이 오는 곳이다. 그 강물에 다리공사가 한창이다. 이제 이곳도 사라질 것이다. 공사가 끝나기 전에 손녀의 흔적을 찾고 싶은 것이다. 임승현 감독은 용의주도하게, 이런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려고 애쓴다. 비극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관객들은 충분히 상황을 그린다. 영화는 예분 할머니의 심정, 가족과의 사연을 충분히 짐작하고, 그들의 행동을 이해한다. 또 한 명의 주인공 지윤(홍예서)의 사연도 절절하다. 도박에 빠져 사라진 아버지 대신 암에 걸린 할머니(정애화)와 살며, 오직 전국체전에서 메달을 받아야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가장 친한 친구가 자신과 함께 탔던 배에서 사고를 당했다니. 이제 할머니와 손녀(의 친구)는 어떻게 슬픔을 극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산 사람은 살아야제..”라는 안식을 찾기까지.
세월이 약이고, 시간이 모든 것을 낫게 한다지만 당사자들은, 유가족들은 그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파리가 잉크병에 빠져서 버둥대는 것을 지긋이 지켜보고,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물 없이 고구마를 꾸역꾸역 씹다보면, 영화는 이미 끝났고, 삶은 또 다시 시작될 것이다. <홈리스>로 주목받은 임승현 감독의 역작이다. 베테랑 김자영, 정애화와 신예 홍예서의 연기가 반짝인다.
▶물비늘 ▶감독:임승현 ▶극본:임승현,김승현 ▶출연:김자영(예분) 홍예서(지윤) 정애화(옥임) 설시연(수정) 김현정(현경) ▶개봉:2023년 12월6일 /12세이상관람가/99분
[사진=인디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