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브리의 명장 미야자키 하야오(宮﨑駿) 감독이 은퇴작이라고 공언한 <바람이 분다>(風立ちぬ,2013) 이후 은퇴를 번복하고 다시 내놓은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원제:君たちはどう生きるか)가 지난 달 개봉되었다. <이웃집 토토로>가 되었던, <모노노케 히메>가 되었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되었던 미야자키의 지브리 세상에 입문한 영화팬이라면 이 거장의 신작에 관심과 기대를 가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전의 영화 개봉 때와는 조금 다른 행보를 보였다. 사전에 홍보(선전) 활동을 전혀 펼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그랬고, 한국에서도 언론시사회 같은 행사 없이 바로 극장에 내걸렸다. 지브리의 자존심인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기대인지는 몰라도, 오랜만에 ‘작품만을 오롯이 보고, 영화의 숨은 의미를 찾아보는’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이 영화는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거대한 산, 지브리라는 장대한 산맥을 오르는 작품이다. 그의 인생과 영화 미학, 혹은 철학이 이 한 편에 집대성된 것이다.
1944년, 도쿄는 불타오른다. 까만 밤하늘이 시뻘건 불꽃으로 휩싸인다. 공습으로 병원이 불타고 그 화재로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은 11살 소년 마히토가 있다. 마히토는 도쿄를 떠나 새엄마의 거대한 저택으로 향한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군수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새엄마 ‘나츠코’는 (죽은) 엄마를 많이 닮았다. 죽은 엄마의 동생이었다. 전쟁 막바지, 모든 것이 빈곤하던 시절이었지만 마히토의 집안은 어쩌면 풍요롭고, 평화로울지 모른다. 어느 날 새엄마 나츠코가 사라지고, 마히토는 신비한 왜가리 한 마리를 뒤를 쫓아 미스터리한 탑 안으로 들어간다. 이제 새로운 세상에서 신비한 모험을 시작한다.
영화제목으로 쓰인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일본작가 요시노 겐자부로(吉野源三郞)가 1937년 쓴 소설 제목이다. 미야자키 감독이 어릴 때 읽고 감동받은 아동서적이다. 소설은 15살 소년이 외삼촌과 함께 삶과 세상에 대해 진지하게 사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휴머니즘적 세계관과 진보적 역사관을 바탕으로 한 청소년 자기계발서였다.(‘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로 번역출간되었다!) 영화는 이 책의 제목과 함께 큰 얼개를 가져온다. 그리고 또 한 권의 책에 기댄다. 존 코널리의 <잃어버린 것들의 책>이다. 12살 소년 데이빗은 엄마를 잃고, 아빠의 재혼으로 새엄마와 이복동생을 새 가족으로 맞게 된다. 어린 소년으로선 받아들이기 현실에서 데이빗의 피난처는 다락방 침실이었고, 이곳에서 동화책을 읽으며 죽은 엄마를 그리워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책들이 소곤거리기 시작한다. 세계대전의 포화가 이어지고, 데이빗은 폭격을 피해 나무의 구멍에 숨었다가 낯선 세상 속으로 발을 내딛게 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두 권의 책을 겉과 속으로 하여, 마히토의 성장담을 그린다. 영화는 충분히 환상적이고, 은유적이며, 또한 직관적이다. 사랑하는 엄마를 병으로, 전쟁으로 잃은 어린 소년의 슬픔과 외로움, 그리고 새로운 공간에 내던져진 채 대면하는 세상에 맞서는 고통을 환상적 이미지로 장식한다.
왜가리나 펠리칸, 앵무새와 거대한 탑, 아슬아슬하게 쌓인 13개의 작은 돌들이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적인 판타지는 화려하고, 아름답고, 흥미롭지만 기존 지브리 작품이나, 전작과는 달리 전해주는 이야기가 관념적이다. 세계관의 조합, 운영, 붕괴나 과거와 현재, 미래의 연결고리 등은 ‘관념적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그것은 미야자키 하야오만이 온전히 이해하는 세상일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성장담이며, 그의 영화인생이 투영된 작품이란 것은 쉽게 느낄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올해 82살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애니메이션으로 완성한 그의 자서전인 셈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원제:君たちはどう生きるか/The Boy and the Heron) ▶제작:스튜디오 지브리 ▶수입:대원미디어 ▶배급:메가박스중앙 ▶개봉: 2023년10월25일/전체관람가/124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