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현장에서 화염병이 퍽 터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최루탄이 터지면서 시큼한 냄새와 콧물 눈물을 질질 흘러본 적이 있는가. 한때는 전쟁터 시가전을 연상시키는 모습이 일상적이었다. 대학가에서 ‘운동권학생들’이 데모를 시작하면 페포포그 차에서 연신 최루탄을 쏘고, 백골단이 검은색 방망이를 들고 시위진압작전을 펼친다. 화염병이 날아다니고 매캐한 냄새의 가스가 하늘을 뒤덮는다. 1980년대, 1990년대를 관통하던 대학가의 모습이다.
장항준 감독의 영화 <1987>을 본 한국관객에게 한 편의 연극이 눈에 띈다. 김태형 연출의 <더 헬멧>이다. 연극 'The Helmet(더 헬멧)-Room's Vol.1'은 2017년 처음 무대에 오른 뒤 색다른 형식 때문에 연극 팬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지난 주부터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다시 팬들을 만나고 있다. 15일, 저녁공연을 앞두고 매체대상 프레스콜이 열렸다. 이날 공연은 ‘룸 서울 공연’이다. 기자는 ‘빅 룸’에서 공연을 지켜봤다.
‘룸 서울’은 무엇이고, ‘빅 룸’은 무엇이지? 연극 ‘더 헬멧’은 독특한 형태로 진행된다. 김태형 연출과 지이선 작가는 ‘헬멧’이 상징하는 무언가를 두 가지 이야기를 통해 전달한다. 바로 최루탄 냄새로 뒤덮인 민주화투쟁 당시의 서울과, 시리아 알레포이다.
시리아는 오랫동안 내전에 시달린다. 매일 폭격과 테러가 일어나고 있다. 그곳에도 천사가 있(었)다. 폭격으로 무너져 내린 건물에서 부상자를 구하고, 단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거는 사람들. 그들에겐 총도, 방탄복도 없다. 단지 하얀 헬멧만을 쓰고 있다. 종군기자들은, 다큐멘터리 작가들은 그들을 ‘화이트헬멧’이라고 불렀다. 민주화항쟁 당시 이른바 백골단 전경들이 쓴 ‘하얀 헬멧’과는 대비되는 이미지이다.
이번에 세종문화회관의 S씨어터에서 공연되는 연극 <더 헬멧>은 ‘서울’이야기와 ‘알레포’ 이야기가 교차로 상연된다. 그런데 더 특이한 것은 각 공연은 극이 진행되면서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뉜다. 관객들은 ‘빅룸’과 ‘스몰룸’을 택해서 관람할 수 있다.
이날 프레스콜에서는 ‘서울 룸’이 전막 시연되었다. 1987년, 전두환의 호헌선언 중대방송이 라디오뉴스에서 흘러나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대학가에 데모가 일어나고, 운동권학생 둘이 백골단에 쫓겨 서점으로 도망 온다. 당시 대학가에 많았던 ‘사회과학서적 전문서점’이다. 순진한 대학생들의 ‘의식화운동’의 거점, 혹은 시발점이었던 곳이다. 서점주인은 서둘러 이들을 서점 뒤편 비밀공간으로 숨긴다. 그리고 벽이 닫힌다. 이제 저 안은 ‘스몰 룸’이 되고, 이쪽은 ‘빅 룸’이 된다. 관객들은 자신이 앉은 자리에 따라 쫓겨 온 대학생의 이야기를 듣는 ‘스몰룸’과 대학생을 쫓아온 백골단의 이야기를 듣는 ’빅룸‘ 관객이 된다.
각 자리에 앉은 관객들은 웅성웅성 울리는 저 편의 이야기를 신경쓸 틈이 없다.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서울 편’이 전해두는 당시 운동권 대학생의 이야기의 밀도는 꽤 높다. 어떻게 운동권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어떻게 운동권이 과격화되는지, 그리고 폭력배 같은 전경(백골단)에 맞서 싸우기 위해 어떻게 조직을 만드는지 들려준다. 그리고, 영화 ‘무간도’ 같은 위험한 프락치의 이야기도 있다. 전막 시연에 이어 김태형 연출과 배우들이 참석한 가운데 간담회가 이어졌다.
김태형 연출은 "'카포네 트릴로지'와 '벙커 트릴로지'를 국내에 소개했고, 해외에서 직접 공연을 보았다. 관객들이 실제 공연하는 환경 속에 들어와 있는 분위기가 부러웠다. 그런 아이디어가 아쉬웠고, 비슷하게나마 해보고 싶었다.“며 ‘더 헬멧’을 기획한 배경을 설명했다.
김 연출은 "처음에는 공간을 나누는 이야기라는 형식으로만 출발했다. 지이선 작가와 시리아의 화이트헬멧을 먼저 생각했고, 이후 백골단 이야기까지 포함됐다"고 덧붙였다. 공연무대가 ‘큰방/작은방’으로 나뉘는 것과 관련하여 “가장 곤란했던 점은 양쪽 방의 방음처리였다. 예산상의 문제로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런 점이 더 극에 집중하게 만든다. (저쪽이 안 들린다는) 그런 연극적 약속을 배우, 관객이 하고 극을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이번 무대에는 초연에 함께 했던 이호영, 이정수, 한송희와 함께 김종태, 김슬기, 강정우, 양승리, 소정화, 김국희, 김보정이 새로이 합류한다. 김태형 연출은 “초연 배우와 다시 하고 싶어서 10명에서 연락했지만 3명만 합류했다. 스케줄 때문이다.”고 전했다.
초연에 이어 이번에 다시 무대에 오른 이정수는 "초연 무대도 훌륭했지만 당시 놓쳤던 부분이 있었다“며, ”지금 시리아는 초연 때와는 상황이 더 나빠졌다. 초연 때는 감정적으로 슬펐다면 이번에는 흘렀던 피마저 말라 딱딱해진,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더 큰 슬픔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서울 스몰룸’에서 ‘뜻밖의 대치’를 연출하는 김보정과 김국희는 액션에 대한 소감도 털어놓았다. 김보정은 "대본을 재밌게 보았고, 무대에서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했다. 몸을 잘 못 쓰는데 액션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국희는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말하고 싶은 작품이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들고 모든 걸 갈아 내는 것 같지만 행복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자, 그럼, 연극 팬들은 어느 작품, 어느 룸을 선택하여야할까. 김태형 연출의 조언. “그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손에 잡히는대로 아무거나 먼저 보시라."고 말한다. 물론, 이 연극에 빠지면, (서울과 알레포) 두 이야기를 다 선택하고, 두 방(스몰 룸과 빅 룸)의 속내를 다 보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니, 일단 아무거나 하나 보시길. 연극 '더 헬멧'은 오는 2월 27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공연된다.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