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행크스가 출연한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달리기만 잘하던’ 그가 체육특기생으로 대학에 진학한다. 그가 캠퍼스에서 마주친 첫 장면은 ‘흑인’ 학생의 등록을 두고 주지사와 미국 정부가 대치하는 역사적인 장면이었다. 1963년 6월 11일 알라바마 대학에서 벌어진 일이다. 당시 주지사는 흑인에 대한 차별정책을 지지했고 워싱턴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어떤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차별정책을 무산시키려할 때이다. 마틴 루터 킹이 워싱턴 행진을 할 때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명연설을 한 것도 이 해이다. 이런 류의 영화에서 걸작 소리를 듣는 <밤의 열기 속으로>에서 사건 해결을 위해 미시시피로 간 흑인 형사 시드니 포이티어가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것도 이 즈음의 일이다. 이미 수많은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 당시 미국 땅에서 ‘흑인의 민권’은 형편없었다는 사실. 흑인들은 백인들과 같은 버스도, 화장실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니 한낱 흑인이 우아한 백인들이 묵는 호텔을, 그들의 교양을 과시하는 공연장을 들어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분명 그런 ‘차별과 분리의 시대’였다. 그런 사실을 볼 수 있는 영화가 개봉되었다. <그린북>이다.
영화 <그린북>을 통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바로 ‘그린북’이란 여행책자의 존재이다. 당시 흑인이 (여전히 흑인이 천대받던) 미국 남부도시를 가게 될 때 - 그게 여행이든 공무이든, 취재든 - 유용하게 쓰이는 가이드북이다. ‘흑인사용가능 호텔’, ‘흑인사용가능 주유소’, ‘흑인사용가능 레스토랑’이 기재된 책자이다. 하필 저자가 ‘그린’ 씨(Victor Hugo Green)였다. 저자 이름을 따서 책 표지도 그린(녹색)이고 ‘그린북’으로 통했다. 해마다 업데이트된 모양인데 책 제목은 정확히는 ‘The Negro Motorist Green Book’(흑인 운전자 그린북)이다. 백인 동네에서 백인에게 해코지 안 당하려면 ‘그린북 안내를 따르라!
영화 <그린북>은 1962년의 상황을 보여준다. 뉴욕에 살고 있는 이탈리아계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는 ‘어깨로 힘쓰는’ 나이트클럽의 경비원이다. 하필 일하는 나이트클럽이 새 단장을 위해 몇 달을 쉬게 되었고 집안의 가장인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뭔가를 해야 했다. 그에게 들어온 새 일자리는 ‘닥터 설리’(마허샬라 알리)를 모시는 운전사란다. 면접을 보기 위해 카네기홀에 갔다가 만난 사람은 ‘흑인’이었다. ‘돈 셜리 트리오’을 이끄는 클래식 피아니스트였다. 내키지 않았지만 괜찮은 조건에 오케이한다. 이제 8주간 닥터 셜리를 태우고 여전히 ‘흑인이 차별대우’를 받는 이른바 ‘딥 사우스’로 순회공연을 다니게 된다. 예상대로 두 사람은 차별의 최전선에서 미국의 진면목을 만나게 된다. 다혈질에, 인간미 넘치는 이탈리아계 ‘발레롱가’가 ‘닥터 셜리’의 형편을 옆에서 보고,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함께 차별을 겪게 되면서, 우정이 한 뼘 더 쌓이고, 미국이 한층 고상해지기 시작한다.
영화는 실제 이야기를 다룬다. 돈 셜리(1927~2013)는 자메이카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적부터 피아노의 신동 소리를 들으며 정상급 피아니스트로 성장한다. 물론, 그 때까지 흑인 음악인은 재즈를 하는 길밖에 없을 때였다.
‘떠버리’ 토니(Tony Lip)라 불린 발레롱가(1930~2013)는 뉴욕 브롱스에서 자란 이탈리아계 미국인이다. 영화에서 언급되었지만 실제 독일에서 군 생활을 했고, 코파카바나 나이트클럽에서 일했다. 돈 셜리와는 1962년부터 1년 6개월간 순회공연을 함께 했단다. 영화에서는 8주로 여정이 압축된다. 이후 발레롱가는 할리우드 배우로 활동한다. 놀랍게도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의 <대부>(1972)에서 그 유명한 결혼식 장면 하객으로 처음 출연한 이래 ‘굿 펠라스’, ‘도니 브라스코’ 등의 영화에서 묵직한 역을 소화해 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미드 <소프라노스>에서 브루클린을 기반으로 한 루페타치 패밀리의 보스 카마인 역이었다.
영화가 개봉된 뒤 평론가의 호평을 받고, 상찬도 받았다. 이 영화는 토니 립 발레롱가의 아들 닉 발레롱가가 각본을 썼다. 피터 패럴리 감독은 일찌감치 영화화를 생각했지만 돈 셜리가 자신의 사후에 영화화되기를 원했던 모양이다. 아마도 성 정체성 이야기가 거론되는 것이 꺼려졌던 모양. 그런데, 아들이 관여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개봉 뒤 돈 셜리의 친척들로부터 불만의 소리가 쏟아졌다. ‘백인의 눈으로 본 흑인’, 즉 시혜자 백인과 수혜자 흑인의 이야기란 것이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영화는 미국의 오랜 문제인 백과 흑의 문제, 차별과 증오의 문제에 묵직한 느낌표를 던진다. 단지, 줄을 그은 자들의 오만과 편견이란 사실.
참, 토니가 여행 중 아내(린다 카델리니)에게 보내는 안부 편지기 무슨 이유에서인지 ‘문학적으로 나날이 진보’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즐겁다.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