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화란’속 17세 소년 연규는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 술만 마시면 폭력을 행사하는 의붓아버지의 집에서, 좁은 방에서 의붓 여동생과 생활하면서, 시궁창 같은 삶이지만 꿋꿋하게 버틴다. 연규는 악착같이 돈을 모아 이곳을 뜰 생각이다. 대학도, 군대도, 연애도 그의 목표가 아니다. 그가 꿈꾸는 도피처는 뜬금없이 ‘화란’이다. ‘네덜란드’ 말이다!
떠들썩한 운동장. 연규는 한참 생각한 끝에 돌멩이를 하나 움켜지더니 달려가서 학생 하나의 머리를 내리친다. 이복여동생 하얀을 괴롭힌 것에 대한 응징이다. 하지만 연규는 정학 당하고, ‘합의금 300만원’을 고스란히 떠안아야한다. 그의 편은 아무도 없다. 엄마도, 아빠도, 선생님도, 그 어떤 어른도 없다. 그때 그에게 손을 내민 사람은 동네 건달 치건이다. 치건은 온갖 나쁜 짓, 범죄를 저지르는 토착 악당이다. 하지만 연규에게는 천사와 다름없다. “날 찾아오지 마!”라고 했지만 내일이 없는 연규는 자연스레 치건을 찾아가고, 치건의 조직에 발을 딛게 된다. 그게 그의 밝은 미래를 약속해주진 못하겠지만, 지금 이 시궁창을 벗어날 기회가 될 것 같다. 하지만 세상은 훨씬 잔혹하고, 인간은 잔인하며, ‘화란’은 너무나 멀다‘
영화 제목으로 쓰인 ‘화란’(和蘭/네덜란드)은 연규에겐 막연한 피신처이다. 모히또를 마실 몰디브 같은 파라다이스이다. 배달 일을 하는 중국집에서 인터넷으로 찾아보는 것은 ‘네덜란드에 대한 피상적 정보’들이다. ‘네덜란드 국적취득/ 귀화’같은 단어가 보인다. 그가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담아둔 박스에는 네덜란드 풍광이 담긴 엽서가 있다. 인터넷만 잠깐 봐도 네덜란드는 살기 참 좋은 곳일 듯하다. ‘언론의 자유, 경제적 자유, 인간개발지수, 삶의 질’ 등 어떤 면에서 보아도 최상위 국가 중 하나이다. 연규가 어떻게 ‘네덜란드’에 꽂혔는지는 알 수 없다. 태어나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는 ‘경기도 명안시’의 지옥도를 벗어나 최대한 멀리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느와르의 모습을 띤 <화란>은 소년 연규의 성장담이다. 비루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소년. 하지만 가족의 굴레는 그의 발목을 영원히 ‘명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들 것 같다. 폭력적 아버지, 두려운 어머니, 가난한 집안, 비루한 생은 지난 17년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삶도 저당 잡힌 듯하다. 연규는 발버둥 친다.
그런 연규에게 손을 내민 치건은 어떤가. 거울을 보는 것 같다. 거울엔 과거의 그가 있다. 저 소년은 나처럼 상처받고, 고통 받고, 외롭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린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기에 ‘300만원’ 단 한 번의 호의로 인연을 끝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영화 <화란>은 연규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면서 치건의 과거를 이야기하고, 그린다. 호수와 낚시, 그리고 나무상자 안의 낚시 바늘은 그를 평생, 명안에 묶어두는 족쇄이다. 그래서 그는 그와 똑같은 과거를 가졌을 동생들을 거둔다. 하지만 딱 그까지이다. 현실에서 살아남는 것까지만 책임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연규를 지켜주고 싶은 것이다.
영화는 느와르의 모습을 띤다. 감독은 연규와 치건의 지옥을 설계하면서 ‘재개발과 정치판’을 끌어들인다. 하지만 연규와 치건의 세상에 너무 큰 그림이다. 명안은 작은 동네이고, 캐릭터는 비루하다. 영화 <화란>을 보고나면 치건의 마음이 될 것이다. 제발 연규는 이곳을 벗어나라고. ‘화란’까지는 못 가더라도, ‘헬’명안은 벗어나라고 응원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른의 마땅한 길일 것이다.
이미지 변신을 노리는 송중기의 도전은 훌륭하고, 홍사빈, 김형서의 연기는 충분히 도전적이다. 그리고 최근 영화에서 무서운 존재감을 과시하는 김종수는 이번 작품에서도 ‘지방의 토호실력자’의 진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화란 ▶감독:김창훈 ▶출연: 홍사빈, 송중기, 김형서, 김종수 ▶개봉: 2023년10월11일 124분/15세관람가 ▶배급: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