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2년 개봉되어 1,230만 관객을 동원한 <광해, 왕이 된 남자>(추창민 감독)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된 <<조선왕조실록>>에 기재된 단 한 줄의 문장에서 출발한다. 광해가 내린 전교, “숨겨야할 일들은 기록에 남기지 말라 이르다”(傳敎曰曰 可諱之事 勿出朝報)라는 짧은 문장에 숨은 비밀을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드라마를 확장시킨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그야말로 이야기의 보고이다. 중종 대에는 ‘물괴’(物怪)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중종 22년(1527년)의 기록에 따르면 "삽살개 같고, 크기는 망아지 같은 것이 나타나 궁궐 안을 소란스럽게 했다“고 기록했다. 당시 한양을 공포로 몰아넣은 ‘물괴’의 정체는 무엇일까. 충무로의 상상력은 이 괴물을 블루 스크린으로 완성시킨다.
조선 중종 대에 한양에 역병이 돌며 민초들이 도탄에 빠진다. 조정은 궁여지책으로 이들을 산속으로 몰아 한꺼번에 죽음으로 몬다. 내금위장 윤겸(김명민)은 이 아비귀환 속에서 어린 아이하나를 구하고는 조정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 어린 아이가 자라 명(이혜리)이가 된다. 중종 22년에 한양에 거대한 물괴가 출몰하여 백성들을 공포에 몰아넣자 왕은 윤겸을 다시 불러내 ‘물괴’를 수색하도록 한다. 영의정(이경영)은 왕을 몰아내기 위해 ‘물괴’를 이용하려 하고, 민심은 폭발할 지경에 이른다.
영화사는 현명하게도 이 영화를 ‘광해’ 스타일의 역사드라마가 아니라 ‘괴물’(봉준호 감독) 류의 크리쳐물로 홍보하고 있다. 과학적으로 덜 계몽된 봉건주의 사회에서는 보이는 것에 쉬이 미혹되고, 보이지 않는 것에 본능적으로 두려워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중종 때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 ‘물괴’가 등장한다. 아마도 돌연변이 짐승을 일컫는 듯하다. 말세의 징조로 여길만한 ‘물괴’의 등장은 민심을 뒤흔들기 충분하다. 영화는 ‘하늘의 계시’인지 ‘역모를 꾸미는 신하의 계략’인지 그 ‘물괴’의 형상을 한참이나 지난 뒤에 스크린에 등장시킨다. 조선 백성을 두렵게 할 형상이 ‘에일리언’이나 ‘프레데터’였다면 너무 아방가르드하고 그로데스크할지 모른다. 삽살개 같기도 하고, 해태 같기도 한 모습이 적당하리다.
오래 전 ‘엘리게이터’(루이스 티그 감독,1980)라는 공포영화가 있었다. 애완용으로 키우던 새끼 악어가 변기 속에 버려지고, 하수구를 따라 흘러간 이 놈은 제약회사 근처에 둥지를 튼다. 제약회사는 비밀리에 신약을 연구 중이었는데 실험대상은 동네 유기견들이었다. 테스트 중 죽은 개는 하수구로 버려지고, 악어는 그 사체를 먹으면서 점점 ‘울트라 괴물’이 되는 것이다. ‘물괴’는 하수구는 아니지만 깊은 산속 계곡 깊숙이 은거하며 ‘돌림병으로 죽은 시체’를 먹으며 괴물이 되어간다.
감독은 두 가지 갈림길에 섰다. ‘엘리게이터’처럼 괴물의 이야기를 그려야할지, 아니면 횃불을 들고 광화문 앞에 집결한 민중들의 봉기로 이야기를 끝내야할지 선택해야 했다. 불행하게도 이도 저도 아닌, ‘괴물’이 되고 말았다. 김명민이 하드캐리하게 이끌었는데 말이다. ‘국내최초 크리처 액션사극’이라는 거창한 홍보문구가 빛이 바래버리는 순간이다.
추석 시즌 전에 개봉된 <물괴>(허종호 감독)는 추석연휴 마지막 날까지 71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은데 그쳤다. 조선의 물괴가 현대의 영화 팬에게는 충분히 미혹스럽지 않았던 모양이다. 감독은 크리처에 대한 욕심 때문에 영화의 진짜 재미와 조선왕조실록의 깊은 뜻을 간과한 듯하다. 2018년 9월 12일 개봉/ 15세이상 관람가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