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금) 밤, KBS 1TV [독립영화관] 시간에는 박문칠 감독의 다큐멘터리 <보드랍게>가 방송되었다. 이 영화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김순악 할머니의 삶을 담고 있다. 공영방송 KBS가 광복절을 앞두고 편성한 작품이며, 기억해야할 작품이기에 여기에 기록한다.
‘위안부’를 다룬 작품은 많다. 영화도 있고, 다큐멘터리도 있으며 애니메이션도 있다. 한국 사람이 만든 작품도 있고, 외국감독의 시선이 들어간 작품도 있다. 전쟁은 오래 전에 끝났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이제 몇 분 살아있지 않다. 꽃다운 나이에 잔혹하게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 당하고, 모질게 살아남아 온갖 수모를 당하고 한 많은 인생을 마감했을 그분들을 생각하며 김순악 할머니의 삶을 따라간다.
김순악 할머니는 1928년 경산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2010년 돌아가셨다. 이미 돌아가신 분이시다.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살아생전 할머니의 영상들을 모아 이 작품을 완성시킨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의 직접적인 인터뷰는 없다. 살아생전 남긴 말과 모습, 그리고 할머니의 기억이 한 사람의 인생과 우리 민족, 우리나라의 역사를 말해주는 것이다.
가난한 시골 할머니는 어린 나이에 돈을 벌기 위해 기차에 오른다. 대구의 실 푸는 공장에 취직한다는 말만 믿고 처음 기차를 탄 것이다. 그런데 기차는 만주로, 또 어디론가 향한다. 일본위안부가 된 것이다. ’나래비‘를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일본군을 하루에 수십 명씩 상대하는 위안부가 된 것이다. 전쟁은 끝났다. 김순악은 해방된 광복의 조국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왠지 안다. 엄마를 아빠를 볼 면목이 없다는 것이다. 무참히 짓밟힌 조국의 소녀를 반갑게, 아니, 적어도 안쓰럽게 여기고 따듯하게 안아주고 보듬어줄 가족이 없는 것이다. 김순악은 여수로 향한다. 그곳에서 작부가 된다. 자신의 과거를 보담아줄 남자도 만난다. 하지만 정말 기막힌 것은 여수반란사건이 일어나고 김순악은 또 다시 절망한다. 그리고, 서울로 간다. 전쟁이 끝난 뒤 할머니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유곽에서, 기지촌에서 색시장사를 하게 된다. 미군 사이에 아이도 낳는다. 흑인혼혈이다.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는 비극을 온몸으로 겪은 것이다. 많은 위안부 할머니 사이에서 김순악 할머니가 살아생전 언론의 주목을 못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짧은’ 위안부 생활 이후의 삶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고상한 것이 아니라 더욱 처연하고 불행했기 때문이다.
김순악은 술을 마시고, 또 마신다. 술을 마시다 조용히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김순악을 보드랍게 대하지도, 인간적으로 대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김순악을 대하는 것은 ‘왈패, ’위안부‘, ’기생‘, ’마마상‘, ’미친개‘, ’개잡년‘, ’깡패할매‘였단다. 처음 사지에서 돌아왔을 때는 부모에게서, 그리고 선진화된 대한민국에서는 두 아들에게 버림받은 셈이 된 김순악은 식모생활을 한다. 하지만 글도 못 깨우친 그는 술로 자신의 삶을 지우려고 했을 것이다.
순악씨의 원래 이름은 순옥이었단다. 옥(玉)은 귀한 집 딸에게나 어울린다고 순악이 되었단다. 그리고 위안부로 끌려가서는 ’사다코‘ ’데루코‘ ’요시코‘ ’마츠타케‘로 불린 모양이다. 박문칠 감독은 김순악의 삶을 예쁘게 포장하거나, 분노를 촉발하는 장치를 심지 않는다. 그저 할머니가 말하고 싶은 대로, 걷고 싶은 대로 놔둔다. 대신 젊은 여자들이 중간중간 할머니의 삶을 낭독한다. 그런데 나중에야 어렴풋이 알게 된다. 낭독하는 여자들은 성폭력피해자, 미투로 고통 받은 사람이었음을.
김순악은 아무도 자신을 보드랍게 안아주지 않았다고 한탄한다. 낭독하는 여자 분이 그런다. “심리상담 받을 때, 저한테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물었다. 저에게 제일 싶었던 말이 할머니와 같다. 힘들었지.. 고생했다... 힘든 것 맞다....”고.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고.
<보드랍게> 마지막은 시민모임과 함께 바닷가를 찾아 유흥을 즐기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쾌지나 칭칭나네.‘ 하며 어깨춤을 추는 할머니의 모습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이다.
<보드랍게>는 2020년 제21회 전주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상과 제12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아름다운 기러기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