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함? 죄책감? 회한?
고(故) 김광석(1964~1996)은 한 시절을 풍미한 가수로 동시대의 공기를 같이 호흡한 한국인에게는 특별한 감성을 전해주는 인물이다. 그가 살았을 때, 그리고 죽은 뒤에도 그의 노래를 수명을 다하지 않고 여전히 울려 퍼지고, 영원히 재생된다. 그의 청승스럽거나 애절한 노래는 고스란히 한국인의 정이고 한이며, 그리움이다. 그러면서 누구나 간직하고 싶은 청춘의 열정과 소멸에 대한 상념일 것이다. 김광석의 노래를 모티브로 한 대표적인 문화상품이 바로 뮤지컬 <그날들>이다. 천재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장유정이 사흘 만에 완성시켰다는 뮤지컬 극작은 2013년 처음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2023년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여섯 번 시즌(햇수로 10년)의 막이 올랐다. 김광석은 세상에 없지만 그의 노래는 여전히 우리 곁에서 울려 퍼지는 것이다.
뮤지컬 <그날들>은 청와대에서 펼쳐지는 미스터리한 이야기를 전한다. 이야기는 1992년과 20년 뒤인 2012년을 오가며 진행된다. 먼저 2012년. 청와대에서 중요한 연회가 펼쳐진다. 한중수교 20주년 기념행사장이다. 이곳에 모자를 쓴 한 여자가 들어오려다 제지당한다. 그와 함께 대통령의 어린 딸이 사라진다. 딸의 밀착경호를 맡았던 경호원 한 명도 행방이 묘연하다. 경호실에 비상이 걸리고 대대적인 수색이 시작되고, 청와대 뒷산에서 흔적이 발견된다. 이와 함께 경호실장 차정학이 20년 전의 일을 떠올린다. 1992년, 처음 대통령 경호실에 발령받아 근무하던 그 시절 벌어진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이다.
1992년,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 경호실에 갓 부임한 차정학과 강무영은 청와대 뒤편 한 건물을 담당하게 된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아니 누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 여자의 정확한 정체를 알 수도, 알 필요도 없다. 그냥 안전하게 지켜만 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원칙주의자이며 연애엔 잼병인듯한 정학과 무엇이든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무영은 자신들의 ‘보호대상자’와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어느 날 그 여인과 무영이 홀연히 사라지는 일이 생기고, 청와대 뒷산에서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사라진 것으로 ‘비밀스럽게’ 처리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월은 다시 20년이 흘러 비슷한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뮤지컬 <그날들>의 매력은 물론 그 시절을 풍미한 김광석(과 동물원) 노래가 핵심이다. 그런데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것은 비밀의 공간인 청와대를 배경으로 해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그 미스터리한 이야기의 핵심은 연애담인 듯하고, 음모극인 듯하며, 정치드라마이다. 기이하게도 그 어느 것 하나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지만, 관객에겐 깊은 인상을 남긴다.
요인 경호원은 케빈 코스트너가 아닌 이상 결코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존재이다. 누군가의 곁에서 ‘그림자’처럼 붙어 그의 생명, 안전, 존재를 책임지는 자이다. 뮤지컬 <그날들>은 바로 그런 경호원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리고 두 명의 경호원은 동료이자 경쟁자로 마주선다. 뛰어난 실력과 책임감으로 뭉친 그들이지만 그들의 신념을 시험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관객들은 청와대에 그런 건물이, 뒷산에 그런 전설이, 경호원이 끌려간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모른다. 그러나 그곳에서 자신의 임무와 열정, 신념, 믿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장유정 감독은 김광석의 노래를 들으며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것이 작전에 실패한 경호원의 이야기로 승화한 것이리라. 청춘을 젊음을 제대로 향유하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고 떠나간 사람. 어쩌면 그의 정체는 우리가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장유정 감독은 그의 뮤지컬작품 <김종욱찾기>와 <형제는 용감했다>(부라더)를 영화로도 만들었다. 언젠가는 <그날들>도 스크린에서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뮤지컬 <그날들>은 지난 12일부터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팬들을 만나고 있다. 이번 공연에서도 객석 한 곳에서는 이 세상에 없는 김광석을 위한 자리가 조용히 마련되어 있다. 혹시 퇴장하다가 보게 된다면 꽃 한송이라도 바치는 것이 어떨까. 참, 대통령 집무실이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겨간 뒤 처음 무대에 오르는 셈이다. 시간 되면 ‘청와대’를 찾아, 뒷산에 올라 무영과 그녀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도 멋있는 일일 것 같다.
뮤지컬 <그날들>에 나오는 노래는 다음과 같다. '변해가네', '나무',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혼자 남은 밤', '그녀가 처음 울던 날', '말하지 못한 내 사랑', '새장 속의 친구', '너에게', '끝나지 않은 노래', '그녀가 처음 울던 날', '그날들', '부치지 않은 편지', '이등병의 편지', '서른 즈음에', '기다려줘', '사랑이라는 이유로', '나의 노래', '먼지가 되어', '꽃', '내 사람이여', '사랑했지만', '거리에서',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등이다. 브로드웨이에 [맘마미아]가 있다면 한국엔 정말 [그날들]이 있다.
유준상은 1993년 <그날들> 초연 무대부터 이번 시즌까지 전 시즌을 빛냈다. 앞으로 10년, 20년은 더 할 것이라고 한다. 기대한다. 올 시즌 무대에는 넷플릭스 ‘더 글로리’의 김건우와 갓세븐의 영재가 무영 역으로 새로 합류한다. 9월 3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다.
▶뮤지컬 그날들 ▶출연: 유준상-이건명-오만석-엄기준(차정학 역), 오종혁-지창욱-김건우-영재(강무영 역), 김지현-최서연-제이민-효은(그녀 역), 서현철-이정열-고창석(운영관 역), 이진희-김보정-김석영(사서 역), 최지호-김산호(대식 역)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2023.7.12.~9.3
[사진=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