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 18일, 대한민국 제 15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져다. 대세론을 퍼뜨리던 신한국당의 이회창 후보를 꺾고 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DJ당선 이후 가장 두려움에 떨었던 곳이 당시 안기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안기부는 ‘국가의 생존을 위한 무명의 헌신과’과 더불어 ‘집권여당의 계속집권’을 지탱하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으로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상황을 조금 이해할 수 있는 영화가 개봉되었다. 윤종빈 감독의 <공작>이다. 안기부가 남(南)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북(北)과 어떤 거래를 했는지, 중국 땅에서 남과 북의 요원들이 어떤 활동을 펼쳤는지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당시 ‘흑금성’이란 암호명으로 활동했던 ‘박채서’의 이야기를 극화한 것이다. 그 흑금성을 연기한 황정민을 만나 무시무시한 스파이작전의 내막을 들어봤다.
영화는 어땠나? “지난 달 칸에서 상영되고 나서 한국기자분들이 이런저런 의견을 냈었다. 초반부가 루즈하다고. 사실 배우가 그런 이야기를 감독에게 말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칸 갔다와서 감독님이 4분정도 잘라냈다. 그래서인지 긴박감이 더 생긴 것 같다. 감독님이야 편집할 때 수천 번 봤을 텐데 줄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영화가 너무 리얼하다. “영화 찍을 때 우리끼리 농담 삼아 그런 말 했었다. 우리 잡혀간다. 남산에 끌려간다. 철봉에 매달릴 것이라고.” 이어 정색을 하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정치적인 이야기이지만 나는 다르게 보았다. 조국과 사상과 신념이 다른 두 남자의 우정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시선을 좁게 잡고 영화를 시작했다. 물론 넓게 보면 남북의 화합을 이야기할 것이다. 그것은 관객의 몫이다. 정치(적인 스탠스)는 필요 없고, 두 남자의 우정이라 생각하고 시작했다.”
황정민은 영화 촬영 중에 여러 번 놀랐다고 한다. “처음에는 두렵다기보다는 불편했다. 김정일 얼굴을 이렇게 대놓고 할 수 있어? 투철한 반공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이게 가능한가. 찍을 수가 있는가 싶었다.“
흑금성 박채서와 배우 황정민
영화 촬영 전에 실제 안기부 요원으로 남북관계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던 ‘흑금성’ 박채서를 만났단다. “실화를 다룬 영화를 만들 때는 그 사람을 최대한 멀리한다. 스스로 그 캐릭터에 갇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본을 보고 너무 궁금했다. 이분은 어떤 분일까. 어떤 신념을 가졌기에 이 일을 택했고. 국가의 부름에 따라 충성을 했을까. 아마 보통사람이었다면 김정일을 대면하게 되면 심장이 터져버릴 것이다.(김정일을 만나기 위해 거치는 일련의 과정을 목도하게 된다!) 직접 만나 그 느낌이나 에너지를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서 직접 만난 ‘흑금성’ 박채서의 느낌은? “첫 인상이 너무 강렬했다. 눈을 보고 이야기를 해보면 대체로 그 사람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는데 그 분의 눈에서는 도대체 무얼 하나 읽을 수가 없었다.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느낌이었다. 오랜 요원 생활을 체득하여 그렇게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황정민은 박채서를 여러 차례 만났단다. 시사회 뒤풀이 때는 가족과 함께 왔었단다. 영화보고 좋았단다. “그 정도만 이야기하셨다. 사모님이 너무 좋아하시더라.”
황정민이 <공작>에서 연기하는 ‘박석영’은 박채서를 모델로 했다. 박채서는 북풍사건이 드러나면서 안기부에서 내쫓긴다. 하지만 이후 노무현, MB정권에서도 대북 비선활동을 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가 2010년(MB), 스파이 혐의로 기소되어 6년 형을 선고받고 꼬박 옥살이를 해야 했다.
황정민은 처음 ‘흑금성’이야기를 듣고는 믿지 못했단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설마 했었다. 그때 나 뭐하고 있었지? 그냥 연극하고 있었는데, 그때 이런 일들이 있었단 말야. 헐~. 대박. 이런 반응이었다. 아마도 대부분의 관객들이 저랑 비슷한 반응일 것이다.”
액션영화의 신기원, 스파이영화의 진화
황정민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북한정권 핵심에 접근하기 위해 대북사업가로 위장하는 위험천만한 임무를 맡는다. “우리가 상상하는 첩보물과는 결이 다르다.”고 영화를 소개한다.
이 영화에는 ‘본 시리즈’나 할리우드 스파이물에서 볼 수 있는 총격전이나 화끈한 액션씬이 전혀 없다. 대신 이른바 ‘구강액션’이라고 명명한 긴장감 넘치는 대치장면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너무 힘들었다. 감독님은 모든 대사 장면을 관객들에게 액션의 느낌이 들도록 다이내믹하게 하라고 했다. 막상 해보니 쉽지가 않았다. 긴장감이 없었다. 연기하면서 점점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별 수 있나. 같이 연기하는 배우에게 부탁해야지. 내가 이것밖에 안되나보다. 좀 도와달라고. 근데 나만 그런 게 아니더라. 성민이형도 그렇게 생각하더라. 서로 액션 합을 맞추듯 대사에 긴장감을 불어 넣을 수 있었다.”
가장 긴장감을 안겨주는 장면은 호텔에서 회담하는 장면이란다. “팽팽한 긴장감이 넘친다. 테이블 밑에서는 정말 칼날이 날아다니는 느낌이다. 누군가 손이라도 하나 올리면, 그게 어떤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그래서 손을 올려야하나 그대로 있어야하나 고민했다. 마치 어릴 때 선생님에게 혼날 때,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모르는 것처럼. 그런 분위기였다.”
황정민은 촬영 현장에서의 그 긴장감이 관객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었으면 했다. “관객들의 반응이 궁금하기 하다. 그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었으면 한다. 실제로는 싸움을 한 번도 안했는데 마치 싸움한 것 같은 긴장감이 전해진다면 감사할 따름이다.”
<공작>에서의 자신의 연기에 만족하나. “연기자는 작품을 할 때 긴장감을 계속 가지고 있어야한다. 작품이 잘 안되면 내가 모자랐구나.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구나 생각한다. ‘군함도’와 ‘공작’ (촬영) 끝내고 좀 쉬었다. 스스로 내 연기를 복기해야할 것 같았다.”
황정민은 <공작> 촬영이 끝난 뒤 연극 <리차드 3세> 무대에 올랐다. “그 연극을 한 이유는 셰익스피어극이라서. 대사도 많고, 장단음을 정확히 체크해야한다. 연극 끝나고 잘 쉬고 있다.”
황정민의 다음 작품은 윤제균 감독의 <귀환>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정거장 ‘살터-03’을 배경으로 불의의 사고로 홀로 그곳에 남겨진 우주인과 그를 귀환시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의 가슴 뜨거운 이야기를 그린 SF영화란다. “완전~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 SF니까 붕 떠 있을 것 아닌가. 잘 쉬고 기운이 충만되면 아마 천장에 붙어서 연기할 것 같다. 기대하고 있다.”란다.
뮤지컬이나 연극 계획은? “내년이나 내후년에 <리차드3세>를 한 차례 더 해 볼까 생각 중이다.”
마지막으로 공작은 어떤 영화로 남았으면 하는가. “재미난 영화로 남았으면 한다. 대박, 강추, 엄지척!” (KBS미디어 박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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